회피형의 집 정리

ep1: 2년 동안 여기 있을 거면 방값이라도 줬어야

by 김문

나는 회피형이다. 그것도 공포 회피형. 내가 회피형이라는 증거는 내 일상 곳곳에 묻어있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지만, 온전한 나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문제가 발생할 때 이 문제를 직면하고 싶지 않아서 회피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중에서도 나의 회피형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있는데, 바로 내 집이다.

내 집 이야말로 나의 회피형 성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다. 갖가지 물건이 불규칙하게 늘어져 있는 책상, 좌식 의자와 책상용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어놓은 옷가지, 언제 사놓은 지 모르는 식재료들이 방치되어 있는 냉장고. 내 집이 깔끔하지 못한 이유를 단지 ‘게을러서 그렇다.’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처음엔 귀찮아서, 그러다 점점 과거의 귀찮음이 만든 산물을 마주하기 싫어서. ‘마주하기 싫다.’ 라기 보단 ‘마주하기 두렵다.’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집 정리를 계속 미뤄왔다. 그러다 보니 내 집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음 놓고 있을 수 있는 곳은 내 침대뿐이었다. 내 침대는 적어도 깨끗하게 유지해 왔으니까. (이것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인지는 모르겠다.) 침대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서는 내 귀찮음의 산물을 마주해야 하니까.



’ 내 집을 리셋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밖에서는 꽤나 깔끔한 편이기 때문이다. 어질러진 것들을 어질러 둔 채로 방치하는 꼴을 못 본다.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에도, 음식을 다 먹은 뒤 식탁 위에 식기들이 방치되어 있는 채로 노는 꼴을 못 본다. 회사 내에서 내 책상 위에 쓰레기가 있는 꼴은 더 못 본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집이 한순간에 깔끔해진다면, 정말 잘 치우고 살 수 있을 것 같단 생각. 하지만 집이 한순간에 깔끔해질 리는 없다.



귀찮음의 산물과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던 도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치우면 안 되나?’ 내 집에는 이런 귀찮고 두려운 것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커피를 좋아해서 구비해 놓은 커피 머신, 좋아하는 책들, 작곡을 위해 마련한 장비들, 내 필름 카메라와 필름 등.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정리되지 않은 집에 놓여 나의 귀찮음과 두려움과 함께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그래서 분명 집에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있기 불편해져서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것도 어쩌면 회피형 성향의 일종이리라. 이런 생활이 익숙하면서도 불편할 때 즈음, 나는 내 집 정리를 결심했다.





바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건강식품 및 박스 치우기

난이도: 하

소요시간: 약 1시간


이 10평 남짓한 원룸 바닥에 발 디딜 공간 대신 2년 동안 자리를 내준 물품이 있다. 바로 엄마가 챙겨준 건강식품이다. 온갖 야채들을 달여서 만든 야채즙, 몸에 좋은 곡물과 영양소들만 들어갔다는 생식, 유기농 콩으로 만든 두유,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고생했을 때 약 대신 먹으라며 사 주셨던 아가리쿠스 등. 물론 엄마가 내 몸 건강을 위해 양손에 쥐어서 보냈지만, 그것도 내가 먹어야 건강해지는 거고. 한 번 먹어보겠노라고 시도한 게 몇 번. 하지만 먹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건강식품들은 어디에 뒀냐, 바닥이었다.



먹다가 실패한 건강식품들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엄마는 이것도 먹어보라며 건강식품들을 손에 쥐여줬고, 나는 그걸 다 못 먹고 방치했다. 그러다 보니 양이 점점 늘어났고, 점점 늘어나는 건강식품들을 감당할 수납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 그 어딘가에 덩그러니 놓아둔 게 벌써 2년이나 지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슬려서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치우기 전 까지는 ‘언젠간 치워야지.’ 생각은 하면서 그 공간에 적응해버린 게 문제였다.



집 정리를 결심하면서 제일 먼저 치우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이 건강식품들이었다. 마침 허리를 삐끗해서 운동도 못 가는 판인데, 집 정리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나중에 할까’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바로 움직여야 한다. 안 그러면 또 미룰 게 뻔하다. 2년 동안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건강식품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생식처럼 가루로 된 것들은 그냥 버려도 될 것 같아서 편했다. 하지만 야채즙, 두유같이 액체로 된 것들은 전부 비운 다음에 버려야 했다. 그래서 싱크대에서 가위를 들고 살짝 잘라서 안에 들어있는 액체가 나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작업을 반복하기를 몇 번, 드디어 마지막 쇼핑백이었다. 그런데 쇼핑백이 뭔가 이상했다. 내 생각보다 쇼핑백 바닥이 좀 더 위에 있었다. 그러니까, 밑에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쇼핑백 안에 쇼핑백이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쇼핑백을 들췄더니 안에 또 건강식품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건강식품들을 치우고 쇼핑백을 들었더니 또 쇼핑백이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또 건강식품이 들어있었다. 분명 과거의 내가 어떻게든 건강식품이 차지하는 공간을 줄여보겠다고 저렇게 넣었을 것이다. 과거의 나에겐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지금의 내가 봤을 땐 황당하기 그지없다.



어쨌든 모든 건강식품을 다 처리하고 나니 공간이 한 층 더 넓어지고 깔끔해진 기분이었다. 공간의 너비로 치면 넓어졌다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언젠간 치워야 하는데 치우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까지 같이 치워지다 보니 훨씬 더 상쾌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 그대로 집 정리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바닥 한 구석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가방들을 정리했고, 한 때 열렬히 좋아했던 그룹의 덕질 물품들을 정리했다. 나눔 하고 남은 물품, 콘서트 끝나고 받은 포스터(집에 걸 자리도 없으면서 이걸 왜 받아왔는지 모르겠다), 포카 포장을 위해 사뒀던 포장재 등. 포장재는 언제 쓸지 몰라서 다른 곳에 정리해 뒀고 나머지는 싹 다 버렸다. 이렇게 바닥만 정리해도 집이 아주 깔끔해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집 정리는 아마 한 번으로는 안 끝날 것이다. 아직 정리해야 할 게 많아서 정리할 공간을 분류하고, 날을 잡아서 하나씩 정리해 갈 예정이다. 정리하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일인데 미루고 미루다 결국 하는 것보단 내가 필요할 때에 나서서 하는 게 집에게도 나에게도 깔끔한 선택지가 아닌가 싶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다 정리하고 내 공간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이 되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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