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라고 !
일찍이 대문 앞에서 픽업 차를 기다리며 아침을 먹고 있었다. 걸어오는 서진이 보였다. 어제는 각자 다른 농장에 가느라 만나지 못했다. 고작 하루 안 봤다고 이렇게나 반갑다니.
“어제 다녀온 농장 어땠어?” 서진이 물었다.
대답이 망설여졌다. 이제 다시는 못 갈지도 모른다고 해야 할까. 픽커로서 일한 지도 거의 일주일째. 따는 속도 늘리는 방법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써야 할 곳에서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다. 익혀둔 습관 같은 건 소용없었다. 오히려 독에 가까웠다.
우리가 세운 기준을 재조정하고 블루베리의 수준을 한참 높여야 했으며, 열매 쓰레기도 치워야 했다. 중간중간, 바닥에 떨어진 것은 없는지 체크하고 짓눌러 흔적을 없애는 짓도 해야 했다. 주의해서 따고 주의해서 넣되, 이미 딴 베리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됐다.
“피스 레이트 농장보다는 확실히 규정이 센 거 같아.” 내 대답에 히로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 피스레이트 농장은 이렇게나 마음이 편안한데!
하루 가지 않았던 피스 레이트 농장을 들어서니까 마치, 고향에 간 기분이었다. 어제의 의기소침을 만회하기 위해, 배정받은 로우로 들어가 나무를 미친 듯이 휘저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왔고, 팀원들이 손을 흔들며 불렀다.
“어제 다녀온 농장 어땠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궁금했다.
“나쁘지 않더라!”
여러 번 혼이 났다거나, 픽킹을 너무 못해서 자괴감이 들었다는 그런 이야기는 뺐다.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을 거 같았다. 이어지는 질문에 머리를 굴리던 찰나, 컨트랙터가 불렀다. “혼자 와요!” 소리치는 그를 보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는 팔자 눈썹이 된 채 물었다.
“죄송해요… 기껏 보내주셨는데…” 고개가 푹 숙여졌다.
“아니. 아니. 사과하란 거 아니고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해서.”
그는 미니멈 아울리 농장 담당 컨트랙터로부터 전화를 세 차례나 받았다고 한다. 우리가 너무 못해서 말이다. 그러고는 거기가 원래 좀 그렇다며, 히로와 내가 예상보다 빨리 미니멈 농장에 들어가게 된 거라 충분히 힘들었을 법했다고 시원한 음료를 손에 쥐여주고는 다독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다시는 그 농장에 갈 수 없는 건가요?”
어제는 확실히, 좋은 기억은 아니다. 어제는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처음으로 머리가 아팠다. 몸은 하나도 피로하지 않았는데, 어제만큼이나 피곤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정신보다 몸이 피로한 게 훨씬 나았다.
“하하 그렇게 쉽게 자르지는 않아요. 다시 기회가 생기면, 그때는 가서 더 잘하고 와요.” 그는 충분히 이해하는 듯 보였다.
- 생각해 보면, 피스 레이트 농장은 막 딸 수 있어서 즐거웠던 거 같다.
미니멈 아울리 농장은 며칠 되지 않아 다시 갈 수 있었다. 새로운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낀 건지, 우리는 2인 1조로 팀이 만들어졌다. 그전에는 친하다거나, 속도가 맞는 워커들끼리 같이 들어갔다면, 이번에는 현재 우리 팀에 속한 사람 중 미니멈 아울리 농장에서 일을 하는 탑 픽커 (속도나 품질 기준을 잘 충족시키는 상위층 픽커)와 기존 피스 레이트 농장에서 갈 만한 몇몇 사람들이 함께 짝을 이뤄 팀이 되는 거였다. 보고 배우며 익숙해질 기회였다.
“반가워요. 앞으로 같이 잘해봐요.” 나와 배정받은 준민은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준민에게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는 나의 속도를 체크하고 어떻게 하면 열매를 딸 때, 분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지.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무엇보다 그가 진심으로 고마운 이유는,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해 주었다는 거다. 우리의 첫 농장 체험에 대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이 겪었던, 날 것 그 자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수도 없이 잘릴 위기에 처했었다고 했다. 여기 컨트랙터로부터 얼마나 모진 말을 많이 들었는지, 별일 아닌 일에도 기가 죽었다고. 호주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 작은 마을, 울굴가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농장 일이 자신의 하루를 일희일비하게 만든다는 게 얼마나 허무하고 허탈했는지 말했다. 그러고는 종종 “제 얘기가 기운 빠지게 하면 어쩌죠.”라며 걱정도 했다.
“탑 픽커? 저는 제가 그렇게 불릴 거란 생각도 못 했어요.”
“늘 바닥 언저리에 있던 저도 이렇게 하고 있잖아요.”
한 편의 성공담처럼 그는 시원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자기 동기들은 한없이 올라가는데,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는 잘린다는 위협을 매일 들었다. 결국 한 번은 잘렸다가, 농장에 사람이 부족해지면서 다시 들어간 경험도 있다고 구사일생이었다며 호탕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늘 외줄타기하는 기분이었단다. 녹초가 된 채 하루를 둘러보는데 현실을 자각할 때마다 몇 번이고 권태에 빠졌다고 했다. 우리는 내내 배를 잡고 웃으며 로우를 타고 나왔다. 확실히 어떤 이야기든 평탄한 이야기보단 굴곡 있는 이야기가 좀 더 흥미진진하다.
- 무한 블루베리 시식회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그의 이야기에 쉽사리 공감하며 맞장구치기에는 빠른지도 모르겠다. 아직 좀 애송이인 듯하다만, 요즈음 내가 느낀 감정과 다름없는 그의 이야기는 힘을 실어주었다.
과정에 지나치게 몰두해, 목표를 잃은 사람처럼. 스스로 가고자 하는 곳에 도달하기 위해 겪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은 정도로.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싶을 때가 있다. 과정에 먹히지 않겠다고 그렇게나 다짐해 놓고선 환경이 조금 변했다고 또 같은 수렁에 빠졌다. 분명, 호주에서 1년 더 살고 싶어서 스스로 내린 결정인데, 어떤 날은88일이라는 숫자가 너무 아득해 보이는 거다.
어제와 오늘. 벌에 쏘인 두 친구가 농장에서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겠다며 울며 떠났다. 조금 친해졌다 싶었던 친구는 다음 주면 마지막 날이라 떠난다고 했다. 매일 올라오는 성적은 알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고 불안해하는 서진과 히로를 보고 있자면, 이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하루가, 기분이, 왜 열매 하나로 좌우되는지 허탈하고 허무했다.
나보다 한참이나 앞선, 내 속도에 맞추느라 답답해도 몇 번을 답답했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왜인지 이게 다 별거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잠시 또 잊고 있었다. 뭐든 처음이라 힘든 거라는 걸 말이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작은 푸른빛 알맹이에 빠져 내가 가는 길을 잠시 잃었다. 그래, 그러했듯 이건 다 과정일 뿐이다.
신기하게도 ‘이게 뭐라고?’ 싶었다. 너무 별거 아니다. 작아도 너무 작은 일이다.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몇 가지 채 되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자는 것. 휴일과 휴식 시간을 충분히 즐길 것. 간단한 일을 하는 것만큼 간단히 생각할 것. 그 외의 것들은 자투리 시간에만 하는 일이었다.
- 젊은 농부의 일탈 = 잔디에 드러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