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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숙한 농부

농장은 처음이라

by euuna








셰어 하우스 왼쪽의 가장 끝 방. 주말 내내 청소했다. 방 옆으로는 작은 화장실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러웠다.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란 말을 들었지만,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을 거라며 반나절 간 청소를 했다. 비슷한 시간에 출퇴근하는 여덟 명이 화장실 하나를 나눠 쓴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은 화장실 주변의 방 사람들도 이제는 편하게 쓸 수 있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농장에 가서 인덕션(Induction)을 하는 날이었다. 인덕션이란, 농장에서 일을 하기 전, 처음 받는 교육을 말한다. 개인 정보와 긴급 연락처, 알레르기 여부에 대해 작성하고 수확 방법 및 농장에서 지켜야 할 수칙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 조심할 것들도, 주의해야 할 것들도 많은 농장



인덕션이 일찍 끝나, 콥스 하버로 나가 아시안 마켓을 찾았다. 멜버른에서 한인 마트 찾는 건 정말 쉬운데, 작은 농촌 도시 콥스 하버에서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우 찾은 아시안 마켓은 쇼핑센터 뒷길, 작은 타운에 있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작은 상점이었다. 살았다. 드디어 떡볶이 먹는다!


김치 한 통과, 밀떡과 쌀떡 그리고 고추장, 올리고당을 샀다. 사장 아저씨는 무심히 마늘 박스를 건네주었다. 차곡차곡 넣어, 박스를 이고는 다시 울굴가로 향했다. 나와 히로 전용 냉장고를 하나 내주었는데 안에는 곰팡이와 악취로 엉망이었다. 출근 전 마지막 날은 냉장고 청소로 마무리하며 히로표 떡볶이를 먹었다. 꿀맛이었다.



- 한국 음식을 너무 좋아하는 일본인



아침 7시. 드디어 첫 출근이다. 블루베리는 잘 먹을 줄 아는데. 블루베리 나무는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다. 블루베리는 품종에 따라 나무의 모양과 크기가 각양각색이다. 우리가 따게 될 나무는 150센티 언저리의 나보다는 좀 더 큰 나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로우에 2인 1조로 짝을 이뤄 들어가, 마주 보고 열매를 딴다. 열매를 딸 때는 분가루가 손으로 인해 지워지지 않도록 최대한 가볍게 따야 했고 즉시 바스켓에 넣어야 한다. 사람마다 열매를 따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대체로 엄지로 살짝 굴려서 떼고 양 손바닥을 마주 모은 채 열매를 담듯 채우고 바스켓으로 넣으면 됐다.


바스켓 하나 당 2킬로가 조금 넘는데, 바스켓은 6개 뿐이기 때문에 가득 채울수록 유리하다. 바짝 채운 블루베리 바스켓을 나무 그림자 아래 모아두고, 솔팅이라는 작업을 한다. (이 과정은 농장마다 차이가 있다.) 솔팅은 자신이 가져온 블루베리를 트레이에 부어 분류하는 과정을 말한다. 손상이 됐거나, 크기가 너무 작다거나, 익지 않은 베리는 이 과정에서 걸러진다. 솔팅은 한 트레이 안에 두 바스켓을 부어 총 세 트레이를 만들고, 정해진 장소로 가 무게를 잰다.



- 블루베리 캥거루



검사를 하는 슈퍼바이저가 팀명과 함께 이름, 무게, 로우 넘버 등 작성하고 나면 새로운 로우로 갈 수 있다, 하루 종일 딴 블루베리의 무게들이 입력되고 얼마큼의 열매를 땄는지 추후 컨트랙터가 단톡방에 워커들의 성적표를 정리해 올려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전 날 자신의 성과와 비교도 해보고 팀에서 어느 정도로 하고 있는지 자신의 위치도 알게 된다.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적어둔 짧은 일기에는, ‘미친 듯이 딸 수밖에 없다…’ 정도로만 적혀있다. 하지만, 선명히 기억하는 거라면, 내리쬐는 햇살이 굉장히 뜨거웠다는 거. 그리고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거다.



- 끝나고 나면 손이 아주 쌔까맣게 변해 있었다.



대체로 일과는 이렇게 흘러간다. 6시 50분쯤 일어나, 고양이 세수 후 아침을 욱여넣는다. 배가 별로 고프지 않더라도 무조건 많이 넣어둬야 한다. 배가 굉장히 빨리 꺼진다. 그리고 얼굴에 선크림을 가능한 한 두껍게. 가득 바른 후, 머리를 땋는다. (참고로 양 갈래나 땋은 머리가 편하다. 나뭇가지에 잘 걸리지 않고 모자를 깊이 눌러쓰기 좋다.) 형광 워커복을 입고 허리띠를 두른 후, 바스켓 여섯 개를 허리춤에 꽂고는 흙범벅이 된 작업화를 챙겨 신고 나간다.


아침부터 강렬한 햇살을 맞으며, 픽업 차를 기다린다. 다 바르지 못한 선크림을 바르거나, 아침을 더 먹는다. 주로 바나나, 딸기잼을 바른 식빵, 사과, 시리얼을 먹었다.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깬 날에는 한껏 여유 부리며 샐러드를 꺼내 브리또를 싸 먹기도 했다.


농장까지 대체로 40분 정도 이동을 한다. 그동안 졸기도 하고, 여전히 허기진 배를 채운다. 농장에 도착하면, 배정받은 로우로 들어가 위에 설명한 과정을 거친다. 따고 모으고 걸러내고 제출하고 또 따고 모으고… 그러다 보면 벌써 점심시간이다.


동네 마트에서 3불 주고 구매한 아이스 백을 꺼낸다. 안에는 얼음물과 싸둔 점심, 그리고 대용량의 선크림이 있다. 세수하듯 바르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 메뉴도 아침과 거의 동일하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면, 다시 로우로 들어가 마칠 때까지 블루베리를 딴다. 5시 정도면 일이 전부 끝난다. 돌아가 씻고 서진을 불러 저녁을 만들어 먹는다. 정리가 끝나면 거의 9시였다. 11시가 되기도 전에 늘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몸을 쓰니, 자연스럽게 일정한 패턴으로 하루가 흘렀다.



- 서진과 점심시간


그렇게 첫 주급을 받는 날이 왔다.

‘각자 입금된 급여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컨트랙터로부터 기분 좋은 메시지가 왔다.


“헐. 호주에서의 첫 급여야.” 내가 말했다.

“나도!” 히로도 설렌 듯 은행 앱을 켰다.


서진과 히로 그리고 나. 우리 사이에는 순식간에 희비가 갈렸다. 나와 히로는 호주에서 받은 첫 급여라는 게, 우리 스스로 벌은 돈이라는 것에 행복했고, 서진은 자신이 멜버른 어느 한 식당에서 키친핸드로 일하며 번 돈의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쥐꼬리 만 한 급여에 충격을 받았다.


“아니, 잠시만. 이거 맞아?” 서진이 우릴 향해 물었다.

“왜? 너 잘못 들어왔어?” 내가 물었다.

“너희 얼마나 들어왔는지 물어봐도 돼?” 서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우리 급여는 놀랍게도 단 몇 불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첫 급여를 받고 나서 확실히 픽킹 실력이 없으면, 이런 급여 상태일 거라는 걸 충분히 알게 됐다. 충격에 헤어 나오지 못한 서진은 내내 저기압이었다. 위로랍시고 건넬 수 있는 말은, 블루베리 따는 능력을 열심히 키워서 좋은 농장으로 가자 따위뿐이었다. 정말로 실력이 늘지 않으면, 한 주에 빠지는 렌트 값을 빼고 식재료비를 빼면 단돈 몇 푼밖에 남지 않았다. 서진은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아직 호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멜버른에서 서진과 나는 시티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투룸으로 각자 방을 썼다. 멜버른을 떠나기 전, 우리가 농장에 가 있는 동안 세입자를 구해야 했는데, 넉넉지 않은 시간과 여러 상황이 겹치는 바람에 결국 서진의 방에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고 왔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셰어하우스 방세뿐 아니라, 멜버른에 있는 아파트에 구하지 못한 한 사람의 집세도 나눠 내야 했다. 이렇게 번다면, 턱 없이 부족할 만했다.






더 열심히 딸 수밖에 없었다. 가끔 훔쳐먹는 짓도 줄이고 쉬는 시간 아닐 때 숨 돌리러 가던 농땡이도 그만둬야겠다고. 화장실도 너무 자주 들락거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픽커라는 직업이 생긴 지, 4일 차. 저녁을 먹고 있는데, 컨트랙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녁은 드셨나요?”

“지금 먹고 있어요. 어쩐 일이세요?”

“히로가 생각보다 성적이 높아서 아울리 농장으로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농장은 크게 피스 레이트 (Piece rate)와 아울리 (Houly job)로 구분된다. 피스 레이트는 생산량 기준으로 페이를 받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블루베리 한 알 한 알이 돈이라는 거다. 하지만, 아울리 농장은 시간당 페이로 일한 시간에 따라 급여가 계산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따야 하는 기준이 정해져 있었고 충분히 넘을 정도여야 했다. 농장은 날씨나 열매 컨디션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준 아래에서 움직이는 농장에 가는 것이 좋았다.


히로는 큰 손을 가진 체력 좋은 젊은 남자답게 농장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미니멈 아울리 농장에 가서도 농장이 규정해 둔 양 정도는 딸 수 있을 거 같다며, 완전히 고정 멤버는 아니어도 한번 다녀와 보면 좋을 거 같다고 컨트랙터는 제안했다. 불안정한 피스 레이트보다 미니멈 아울리 농장으로 가서 정확한 출퇴근 시간과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 게 모든 농장 워커의 바람이므로 히로에게도 당연히 좋은 제안이었다.


“아 근데 혼자 말고”

“히로랑 같이 가주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지금까지 피스 레이트 농장들과 다르게, 미니멈 아울리 농장은 꽤나 규정이 빡빡했다. 우리와 꽤 가까워진 컨트랙터는 히로가 걱정됐다. 영어보다는 한국어가 더 편하다는 히로는 농장 내의 규칙이나, 종종 바뀌는 시스템 등에 관한 부분을 전부 한국어로, 나를 거쳐 어렵지 않은 언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체험한다고 생각하고 나도 같이 가서 히로가 첫 적응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란 이야기였다.


분명 좋은 일이긴 하다만, 그럼 서진만 남게 되는 일이었다. 하루뿐이지만 서진의 입장에서는 섭섭한 일이 됐다.


“너희가 잘해서 거기 고정 워커가 돼 버리면 어떡해?” 서진이 불안한 듯 물었다.

“그럴 리가. 히로면 몰라도… 걱정하지 마”


픽업 차를 타면, 서로의 어깨에 기대가며 꾸벅 졸아가며 출근하고 하루의 가장 큰 고민, 저녁 메뉴를 정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늘 자리를 맡아두곤 모여 앉아 땀을 식히고 서로의 물을 챙기고 긴장한 근육을 돌아앉아 풀어주는 게 일상이었다.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고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의지할 곳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같은 곳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당연한 일상은 사라지고 마는 거였다.



- 셋이 하나



다음날 긴장된 마음을 안고 다른 픽업 차에 탔다.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말로만 듣던 미니멈 아울리 농장에 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전의 단기 셰어 하우스에 머물 때, 짧게 이야기를 나눴던 워커들은 미니멈 아울리 농장에 가면 여러 면에서 나아지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라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피스 레이트 농장에서 함께 어울리는 워커들의 바람도 오직 미니멈 아울리 농장뿐이었다. 농장에서 일한 지 2~3주는 지나야 갈 수 있다길래, 아직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히로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히로와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첫 농장에 대한 기대만 잔뜩 키워져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이다.



- 농장 다닐 적 질리도록 먹은 초코 시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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