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좁은 틈 사이로

여유를 유연하게 만끽하기

by euuna








유연한 사고는 꽉 막혔었던 경험으로부터 형성된다. 몇 번의 시행착오 속에서 자주 부딪침으로써,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뜻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사고의 길이가 쭉쭉 늘어난다. 가장 큰 장점은 얽매여 있어도 자유롭다는 것이며,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가볍고도 유연한 사고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로부터 가벼워지려면, 무겁다고 느꼈던 적이 무조건 있어야 한다.

드디어 컨트랙터와 대면하는 날이 왔다. 평소답지 않을 정도로 걱정이 쏟아졌다. 몇 분 전, 컨트랙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라고 말했다. 도망가지 말라는 건가? 머릿속에 떠오른 장난스러운 의문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찾았던 수많은 사고와 사기에 대한 정보가, 잠 못 이루는 친구들이, 갈 곳 없는 이 상황이 나를 점점 옥죄어 왔다.

부엌에 놓인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 그를 맞이했다. 까무잡잡하고 체구가 작은 이 남자는 늦은 밤 미안하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새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집을 훑고는 다른 셰어생들을 찾아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처음 뵙네요. 불편한 게 많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아뇨. 짐을 못 푸는 거 말고는 딱히…”라며 말을 흐렸다.

“집은 좀 찾아보셨어요?”

“찾아보고는 있는데…”





울굴가는 흔한 셰어하우스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도시라면 아파트나 유닛, 다세대 주택 등 다양한 형태의 집에 들어가 살 수 있지만, 여기는 컨디션과 가격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그냥 세입자를 구하는 집이 없었다.

“저희가 찾은 곳이 있긴 한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내가 물었다.

겨우 찾은 두 곳이었다. 11명 정도가 함께 사는 커다란 셰어하우스 하나. 그리고 거리가 조금 먼 숙소가 하나 있었다. 유심히 보던 그는 메모지에 간략히 지도를 그렸다.

“여기가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라면, 대체적으로 농장은 이쯤 있어요.”

“이 근방의 집들이라면, 농장까지 갈 때 적어도 2~30분이면 충분해요.”

“하지만 알아 온 집들은 조금 더 위로 가야 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거리가 너무 멀어서 픽업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아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절망에 빠졌다. 그가 그린 그림에서 우리가 찾은 곳은 농장과 꽤 거리가 있었다. 픽업 차량이 없다면 일을 할 수 없는 거고, 그렇다면 거기 살 이유가 없었다.

농장 출근은 같은 작물일지라도 품종에 따라 다양한 곳에 있었다. 출근 전날 밤 다음날 어느 농장으로 출근하는지 연락이 온다. 출근지는 상황이나 작물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컨트랙터 말에 따르면, 어느 농장을 가더라도 큰 무리가 없는 부근 정도에 살아야 픽업도 수월하다는 거였다. 더는 보여줄 것도 없어, 멍하니 있었다.

“최대한 노력하고 있어요.”

“같이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어서.”

말뿐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는 우리가 같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회사 내에서 전체 하우스를 보고, 어느 방이 공실인지, 나갈 사람이 있는지, 어떤 사람이 노티스를 냈을 때, 그 사람이 나가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등 여러 부분을 따진 후 방을 배정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그도 그 나름대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긴 이야기를 끝으로 컨트랙터는 돌아갔고 우리는 다시, 소파로 가 나란히 등을 기대 누웠다.

“어떡할래?” 서진이 물었다.

“일단,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아직 한 주도 안 지났잖아.”

예상했던 걱정들은 전부 빗나갔고 조금만 시간을 달라는 컨트랙터를 믿고 싶었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봤자, 이곳을 떠나는 정도다. 떠날 마음이라면, 빨리 떠날 테지만 믿고 온 컨트랙터에게도 이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일어나는 듯, 어디서 어떤 문제를 만난다는 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히로와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조금 여유가 생긴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만.






서진과 히로는 비염과 먼지 알레르기가 심해, 방에서 자기 어려웠다. 특히, 히로는 말보다 기침을 더 많이 하는 듯했다. 우리는 이 집을 ‘코 간지러운 집’이라고 불렀다. 어디를 만져도 두툼한 먼지들이 깔려 있었고 어느 방은 시간이 멈춘 듯해 보였다. 흐르는 콧물을 막겠다며 코에 휴지를 욱여넣은 서진과 히로는 알레르기 약을 나눠 먹었다. 결국 우리는 거실로 나와 발코니 창을 조금 열어두고는 소파에 누워 한참을 떠들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할 일이 없는 우리 셋은 다시 콥스 하버로 갔다. 1시간 텀으로 오는 버스를 기다려서 탄 뒤, 한 시간 반가량 꼼짝없이 이동하면 겨우 콥스 하버에 도착한다. 왜인지 이 커다란 쇼핑센터는 정겨운 느낌이 있었다. 멜버른이 잠시 그리워졌다. 편안하던 생활이 조금 그리워졌다.


커다란 쇼핑센터를 돌며 구경하던 중 컨트랙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집 구했어요! 괜찮은 집인데...”

“진짜요?”


놀라 짧게 소리를 지르니 서진과 히로의 얼굴이 밝아졌다. 질문을 쏟으려는 찰나, ‘문제가 하나 있어요.’라는 거다.


구한 집은 두 집이었다. 하나는 여성 전용 셰어하우스, 하나는 지금 임시로 지내는 집처럼 여덟 명이 사는 남녀 공용 셰어하우스였다. 여성 전용 하우스에는 딱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고 남녀 공용 하우스에는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두 집은 사이에 어느 집 하나만을 끼고 있어 무척 가깝기는 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와 서진은 함께 살 수 없었다.


서둘러 결정해야 한다는 컨트랙터의 말에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옆에 붙어 전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서진과 히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라셔?”

“구했대?”


컨트랙터는 이것보다 좋은 기회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혹시라도 그런 집이 나온다면 이사 시켜 줄 테니 잘 생각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구했다는 말에 웃음을 짓던 서진과 히로는 말을 이어 나가는 내 이야기를 듣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고민을 하는 듯한 서진은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갈게.”


- 서진의 셰어하우스


훗날 서진은 어린 히로에게 나를 주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어쩐지 빼앗기는 기분도 들었다고 했다. 당연히 우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장난처럼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게 신기하면서도 슬펐다고 한다.


적응해야 하는 것들은 넘쳐나지, 친한 친구와 함께 살 수도 없지. 게다가 혼자 떨어진다니. 어떻게 마냥 살 곳이 생겼다고 기뻐하기만 할 수 있었겠는가. 서진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멜버른에서 살 적 셰어하우스만큼은 싫다던 서진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적응은 물론, 다른 무리 속에서 혼자 살아가야 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막연함에 대한 불안감도 여러 번 삼켜냈을 터였다.


우리는 지나쳐 온 마트로 발걸음을 돌려, 필요한 물건들을 담았다. 각자 사용할 짐들과 이불, 두고 온 것들이 많아서 필요한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몇 번의 이사 덕분에 깨달은 점은 모든 걸 갖추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는 살 수 없었다. 물건을 하나 담을 때마다 없으면 몇 번을 재차 생각했다. 없더라도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면 절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서진은 장난스럽게 히로에게 툴툴거렸지만, 히로는 내심 안도했다. 우리 중에서도 가장 예민하고 걱정이 많던 이 친구는 며칠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걱정 속에 빠져 살았다. 무엇보다 조금 할 줄 아는 한국어 때문에 답답함도 무척 컸다. 한국인들만 가득 사는 그 집에 같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다행히 조금이나마 그를 안심케 했다. 히로는 발코니로 나가 한참 동안 전화를 했다.




“나 지금 기분이 이상해.” 히로가 말했다.

“왜?”

“아빠가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는 게 처음이야.” 히로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싶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모르는 걸 하나 알고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던 거다. 그건 우리로부터 반강제적으로 배웠던 한국어였고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웃음 어린 얼굴에는 안도와 자신의 성장에 대한 뿌듯함이 번져있었다.

그러고는 “아- 이제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어!”라고 하는 거다.

그의 단순한 웃음이 서진과 나에게도 옮겨붙었다. 한참을 웃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고는 이내 거실로 돌아가 다시 쪼르르 붙어 잠이 들었다. 아마 울굴가에서 우리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이겠지.





어떤 기대감이나 불안감에 손이 시린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럼 내가 또 나를 어딘가에 가두었단 걸 알게 된다. 생각하나 바꾸면, 사고에 작은 틈 하나 두면 여유가 스며든다. 그때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낀다. 나를 여닫는 것에 자유로워진다면, 조금 더 가벼워지게 되어 있다. 그건 무언가를 포기해 버린 기분도 아니며, 그렇다고 무시해 버리는 감정이 아니다. 모든 것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봄으로써 초연해지는 것이다.


하나의 문을 열고 커다란 담을 넘어갈 때, 차오르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또 새롭게 찾아올 변화에는 가뿐한 기대감과 불안함이 기분 좋게 스며든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정신이 유연해졌다.



- 울굴가에서의 첫 셰어하우스






keyword
화,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