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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을 찾아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용감하다.

by euuna








어수선한 분위기의 셰어하우스에 간단히 짐을 풀어두었다. 창문 밖으로 정신없이 지나가던 풍경이 이제야 기억났다. 픽업 차를 타고 깊숙한 시골로 들어오면서 지나친 곳들은 호주에 와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드넓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여러 동물은 마치 모형처럼 보였다.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있다, 문득 블루베리 픽커를 찾는다던, 우리가 본 게시글 마지막 단락에 숙소 가까이에 바다가 있다’고 적혀 있던 게 생각이 났다.


“근처에 바다 있다던데, 밖으로 나갈까?” 내가 물었다.


나가자는 말에 벌떡 일어나는 친구들이 웃겼다.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으면서도 그런 우리 상태가 싫었다. 약간의 생기를 찾은 듯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 새와 고양이



동네의 여러 작은 상점들을 지나, 커다란 공원을 가로질러보니 아파트로 잔뜩 메워진 멜버른과 달리, 개성 있는 하우스가 즐비해 있었다. 앞마당은 물론 뒷마당까지. 잔디를 깎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원을 가꾸거나 선베드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북적이는 멜버른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이었다.


커다란 레몬 나무를 가진 파란색 지붕의 집 대문 앞 박스에는 ‘Free Lemons’이란 문구와 레몬이 담겨 있었다. 이런 건 너무 귀엽지 않냐며 우리는 거리 한복판에서 여유를 잔뜩 부렸다. 대문 앞 꼬리만 살랑이며 지켜보는 고양이에게도 조용히 손을 흔들면서 말이다.


도로는 한산했다. 지나다니는 차도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멜버른에서는 하루에 한 번은 꼭 탔던, 띵- 띵- 울리며 지나다니는 트램이 없었다. 수영복 차림의 여러 사람이 지나가고 축축해지는 공기에 어렴풋이 바다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신기할 정도로 복잡하지 않은 거리여서 숙소에서 나와 쭉 걷기만 했더니 어느새 곧 바다 앞이었다.





멜버른에서 봤던 세인트 킬다 비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맑은, 마치 스스로 정화하고 있는 듯한 깨끗하고도 투명한 바다였다. 시원한 바다에 발을 담그고는 바다에 처음 온 사람처럼 내내 뛰었다. 파도가 밀려 들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가 이제 해방이라는 듯, 환영한다는 듯했다.


처음을 기념하자며, 젖지 않은 모래사장을 찾아 폰을 세워두고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고 모래 위에는 파도 탓에 금세 사라지고 마는 이름을 새겼다. 이렇게 좋은 바다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됐다. 그저 바다만으로도 행복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 Woolgoolga Beach


드디어 허기가 졌다. 긴장한 탓인지 배고픔도 못 느꼈던 우린 배를 부여잡고는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오다가 피자 봤는데.”

“먹자!”


여기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중북부 해안에 있는 조용한 시골 마을, ‘울굴가’라는 곳이다. 그 흔한 한식당이라고는 작은 치킨 가게가 다인 작은 마을 울굴가. 울굴가의 첫인상은 100점 만점에 100점이었다. 뻔하지 않은 호주 시골.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불안한 상황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드넓고 반짝이는 바다가 있는.



- 바다 가까이에 산다는 건 좋은 거구나.



바다를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피자를 먹었다. 꿀맛이었다. 시원한 바깥 구경을 끝으로, 숙소로 돌아가니,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이 집에서는 우리를 포함해 총 7명이 산다. 방은 나뉘어 있지만 남녀 구분 없는 곳이었고 말 그대로 셰어하우스였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셰어하우스




바다로 향하는 길, 바닥에 누군가 새겨두고 간 글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넌 네가 생각한 것보다 용감하다.'





간단히 인사 후, 저녁밥 준비를 했다. 아직 아무것도 마련되지 않은 우리에겐 그래도 히로가 있었다. 오는 길에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더니 뚝딱 만들어준 밥을 먹고는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땐 모든 게 다 경계였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숙소는 엄청나게 어수선했다. 게다가 낙후돼, 고장 났거나 불편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불편함은 이곳이 우리 숙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체로 농장의 숙소는 이런 방식으로 돌아간다. 한 농장에 한 명의 컨트랙터가 아니라 여러 컨트랙터가 존재한다. 컨트랙터마다 컨트랙터 이름을 따 ㅇㅇ팀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예컨대 제인이라는 컨트랙터가 있다면 그 컨트랙터와 연락한 우리는 제인 팀이라는 거다. 이 팀 말고도 여러 팀이 있고 컨트랙터가 렌트해서 빌린 집에 셰어생을 넣는다. 컨트랙터가 빌려둔 집 중에서 조건에 맞는, 예를 들어, 성별이나 같이 온 인원수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하고 결정이 나면, 집을 배정 받는다.


당시, 듣기로는 어떤 문제가 생겨 이 집의 계약이 갑작스럽게 끝나게 돼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당장 들어갈 집이 없는 상태라, 임시 거처로 당분간만 이 집에서 지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짐을 풀 수 없다는 것과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없다는 게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들어갈 집이 없어서 언제까지 어떻게 대기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아직 계약서를 쓰기 전이었지만, 컨트랙터가 숙소를 찾아오는 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마땅히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없다고 하니 점차 믿음이 사라졌다.


“만약, 집이 영영 구해지지 않으면 어떡해?” 서진이 물었다. “설마 그런 경우도 있어? 그러면 애초부터 우리를 부르면 안 되지.” 상상도 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아직은 용감한 떠돌이



이튿날 아침부터 분주했다. 컨트랙터만 믿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사기꾼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믿음직한 느낌은 없었다. 자신도 집을 계속해서 찾고 있으니, 우리도 개인적으로 집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물론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애초에 컨트랙터를 통해 농장에 온 이유가 숙소와 차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기 같아.”


대체로 모든 연락은 나와 했기 때문에 서진과 히로의 마음은 이미 컨트랙터와 회사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나면, 뾰족하게 눈을 뜨고는 내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나는, 늘.


“아직. 못 구했대. 며칠 걸릴지도 모르겠다.”던가

“우리도 같이 좀 알아봐 달라고 하는데.” 또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라고 되묻기도 했다.


내 반응으로 인해 이들은 더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길로 서진은 어머니와 전화 좀 하겠다며 자리를 피했고 답답함을 토로하던 히로는 개인적으로 컨트랙터와 연락하고 싶다며 전화를 걸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임시지만 함께 살고 있는 셰어 하우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어쩐 일인지 일찍 마치고 돌아온 이들은 우리에게 언제부터 일을 시작하냐며 물어왔다.


“아직 집을 못 찾았다고 해서 언제까지 기다릴지 모르겠어요.”

“네?!”


아직 들어갈 집이 없다는 말에 모두가 놀라, 어쩌면 좋냐는 듯 말했다. 이들은 우리에게 여러 방법에 대해 조언해 주었지만 당장 따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양옆의 두 친구는 이미 울적함에 지배당해 있었다. 나는 우리가 같은 컨트렉터의 팀인지 물었다. 우리 컨트랙터가 진짜 괜찮은 사람인지,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믿을 만한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 사람에 가깝지.” 가장 큰 언니처럼 보이는 언니가 말했다.

“근데 조금 답답한 사람은 맞는 거 같아.” 옆에 앉은 일본 친구가 수긍하며 덧붙였다.

“답답함과 착함의 콜라보?”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그는 오히려 수더분한 느낌에 가까웠다. 느린 어조에, 차분한 목소리. 늘 우리 상황을 최대한 배려해 주려 애쓰는 듯 보였다. 컨트랙터 입장을 생각하자면, 회사에서의 압박도 견뎌야 하고 셰어생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그 중간의 위치라 그도 제법 힘들 법했다.


우리는 최대한 우리가 함께 붙어있었으면 했고 연락한 컨트랙터의 팀으로 들어가 같이 잘 지내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그를 계속해서 믿기에는 불안했다. 저 마음속 깊이 불안함이 일렁이며 쫓아왔다.


그리고 그 날밤 우리는 계약서를 들고 온 컨트랙터와 드디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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