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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한 겁쟁이 탈출기

미소 한 번만 지어주세요

by euuna








오며 가며 마주친 몇몇 워커들과 처음 보는 워커들이 잔뜩 있는 커다란 규모의 미니멈 아울리 농장. 차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 계속 걸었다. 큰 트럭 앞, 두 줄을 만들어 서는 걸 보며, 히로를 불러 데리고서 따라가 줄을 섰다.


같은 열매를 따는 거라 하더라도 농장마다 각기 다른 규정이 있다. 블루베리 크기, 사이즈, 색상 등. 열매를 제출하기까지의 과정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주로 다닌 피스 레이트 농장에서는 자신의 바스켓에 채워 온 열매를 트레이에 부어 솔팅(열매를 골라내는 작업)까지 마쳐야 제출을 할 수 있었다.


여기는 열매만 따면 되는 곳이었다. 기다란 줄에서 각자 네임택을 받고 거기에 자신이 받은 번호를 적는다. 나는 17번이었다. 이곳에서 준 바스켓을 들고 블루베리를 가득 채운 뒤, 네임택을 바스켓에 붙여 제출한다. 솔팅은 슈퍼바이저나 컨트랙터가 직접 하고 그 과정이 끝나면 전산에 번호와 킬로그램을 입력한다.





그리고 열매를 버리는 트레시 바스켓도 오른쪽 옆구리에 하나 끼우고 일을 해야 했다. 물렀거나 상했거나 오염이 되어 있으면, 따서 버려야 했다.


낯선 시스템이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무실도 있는 대규모 농장에서 픽커로서의 업무만 잘하면 된다는 게, 명확한 규칙처럼 느껴져 마음에 들었다. 피스 레이트 농장에서는 대부분 따는 양만 생각하다 보니 보이는 곳만 따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면 미스가 난 로우라고 다시 따러 가야 하는 성가신 일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로우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휴식 시간이 아니라, 여기는 정해진 시간에 모두가 나와야 했다. 확실히 체계적이었다.


“히로랑 같은 로우에 들어가시면 돼요.” 슈퍼바이저가 말했다.

“네!” 첫날이니까 기본만이라도 잘하길 바랐다.





첫 번째 로우에 들어가,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따기 시작했다. 피스 레이트 농장보다 더 열심히 해야 했다. 로우의 3분의 1쯤 땄을 무렵, 컨트랙터가 왔다. 참고로 우리 팀의 컨트랙터는 이곳 담당이 아니라, 처음 뵙는 다른 팀의 컨트랙터였다.


“앞으로 와서 미스된 곳들 다시 따세요.” 그는 히로에게 말했다.


히로가 마음이 급했구나 싶었다. 손이 빠른 히로는 금세 내가 따는 구간 근처로 왔다. 몇 분이 흐르고 로우의 반에 왔을 때 다시 컨트랙터가 왔다.


“다시 앞으로 와서 따세요.” 그는 블루베리 몇 알을 히로의 바스켓 안에 넣으며, 한숨을 쉬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미스가 많았나요?” 히로가 물었다.

“네. 처음부터 다시 따세요.” 그는 로우를 타 넘어 반대편, 내 로우로 넘어왔다.


그러고는 내게도 ‘처음부터 다시 따라.’고 말했다. 미스가 얼마나 많았길래. 이런 경고를 들어본 적 없었던지라 큰 사고를 친 기분이었다. 속도를 높여 로우가 시작되는 첫 나무로 올라갔다.


“히로. 미스 많아?” 내가 물었다.

“아니. 나 정말 왜 자꾸 가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히로는 억울한 듯 대답했다.


괜찮은지 의문 들게 하는 것들은 죄다 트레시 바스켓 안에 넣었다. 로우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설마. 우리만 남은 거야?” 맞은편 히로에게 물었다.

“그런 거 같은데…”


진작 로우를 끝낸 이들은 이미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고 없었다. 이 커다란 구역에 우리뿐이었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서둘러 블루베리를 따고 바스켓을 챙겨 급하게 나왔다. 커다란 트럭 앞, 솔팅을 하는 컨트랙터에게 바스켓을 건네고 슈퍼바이저로부터 새로운 로우를 안내받았다. 경고받으니까 지나치게 재고 따져가며 하느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정신 바짝 차리자는 생각뿐이었다. 히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새로운 로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컨트랙터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 여기로 온다. 히로의 로우에서 블루베리를 몇 개 따고는 그의 바스켓 안에 넣어주었다. 또다시 나무를 힘껏 벌리며 내 로우로 성큼 넘어왔다. 그는 내가 지나온 길을 따라 올라가다 걸음을 멈췄다. 땀이 났다.


“두 분 다 하던 거 멈추고 이쪽으로 오세요.” 낮은 그의 목소리는 진땀 나게 했다. 아, 조금만 친절해 줄 수는 없을까? 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다음에는 진짜 맴매라도 맞겠다 싶었다.


“픽킹 일하신 지 얼마나 됐어요?”

“일주일 정도 됐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 팀 컨트랙터가 블루베리 어떻게 따야 한다고 안 가르쳐 줬어요?”


회사에는 여러 컨트랙터가 있다. 그들의 성과는 그들이 이끄는 우리, 워커들로부터 비롯된다. 팀을 잘 관리해서 워커들이 오래, 잘 적응하며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좋은 농장에서 고정 멤버로 자리 잡을 수 있게끔 해야 하며, 농장주와의 신뢰 관계를 위해, 더 엄격히 검사해야 했다.


‘제대로 안 가르쳐 줬냐’라고 묻는 그를 향해 ‘배웠는데, 우리가 부족해서 그렇다’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한껏 고개가 숙여졌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팀 컨트랙터와 이곳을 담당하는 컨트랙터는 사이가 썩 좋지 않다고 한다. 계속해 언급하는 우리 팀 컨트랙터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흘려 잘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 간의 사이와는 별개로 못하는 건 내 문제였고 여기서 살아남겠다고 우리 팀 컨트랙터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충분히 많은 걸 가르쳐 줬다. 특히, 손이 작은 나에게는 손에 맞게 따는 법을 알려주며 지금은 느리더라도 계속 신경 쓰다 보면 늘게 될 거라 격려했다. 나에게만 아니었다. 워커들은 그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늘지 않는 성적에 기죽은 이들을 데리고 가 맛있는 걸 사 먹이기도 하고 자신이 딴 열매를 워커들의 바스켓에 나눠 넣어주며 사기를 북돋았다. 일이 끝나면, 매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어서 돌려보내곤 했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1불짜리 아이스크림



어떤 자세를 해야, 잘 넘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기어코 ‘이런 식이면 여기서 잘려요.’까지 들었다. 이런 식이라는 게 뭘까? 물어봐도 될까? 일단 1보 후퇴했다. 조금만 상황을 보고 물어봐야지. 당장 잘릴지도 모르지만…

얼마나 집중해서 땄는지. 또다시 조용해진 구역에 나뭇가지를 뒤적이는 소리만 남았다. 저 멀리 시끌벅적한 소리에 점심시간이 되었구나 싶었다.


“점심시간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봐.” 나는 한껏 집중한 히로에게 말했다.


로우 앞으로 뛰어나가 둘러보니 점심시간이 막 시작된 듯해 보였다. 이전 농장들에 있을 때는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배가 금세 꺼져 단번에 허기짐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일을 시작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지 않았다. 블루베리를 서리해 먹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히로! 나와봐! 점심시간이야.” 나는 히로를 불러냈다.


푸석해진 빵을 물고 천천히 씹었다.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기회를 준 컨트랙터에게도 미안했다. 무엇보다 세상 근심 다 껴안은 듯 보이는 히로의 모습도 걱정이 됐다. 지금부터 아무리 열심히 한 대도 미니멈으로 정해진 양을 넘는 건 무리일 듯해 보였다. 그리고 언제 또 이곳 컨트랙터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열매는 자기가 머무른 자리에서 신속하고 깨끗하게 따야 한다. 계속 늦추지 않아야, 시작부터 끝까지 잘 이어갈 수 있다. 그러면 뒤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불시 검사가 자꾸 뒤를 돌게 했다. 하나라도 남아있을까 봐 걱정돼 앞으로 잘 나아가지 못했다.





점심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제각기 무리를 이루며 반대 구역으로 향했다. 우리도 빨리 끝내고 가자며 히로를 끌었다. 그때였다. “두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솔팅 작업을 하던 컨트랙터가 우리를 불렀다.


“각자 거 솔팅하세요.” 그는 트레이 두 개를 바닥에 내렸다.

“서로 것도 비교도 좀 해보고. 뭐가 다른지 보세요.”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의 트레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우리는 트레이 앞에 웅크려 앉아 열매에 묻힌 분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열매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무슨 큰 문제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멍하니 있을 수도 없었다. 땀도 식었겠다, 이제 기회가 왔다.



- 솔팅 트레이에 부어두면 전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픽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무래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을 거다. 오늘따라 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더 몰아붙인 걸 수도 있고, 첫날이라 신고식일 수도 있고 사실 힘들게 교육해 둬야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일 수도 있다. 이 더운 날씨에, 일을 한 지도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들이 그에게는 엄청나게 번거로울 수 있었다.


“이런 것도 빼야 할까요?”

“트레시 바스켓에는 이런 거 넣으면 될까요?”


그만큼 잘 살아남아야 한다.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가르쳐 주고 싶게 만들어야 하고 기회를 준 만큼은 해내야 했다. 그의 앞으로 가, 열매를 하나씩 들어 보이며 도움이 필요한 눈빛을 보냈다. 우리는 지금 죄송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다.


겁먹고만 있기에는 기회가 아까웠다. 잘 해내 보고, 해 보이고 싶었다. 가르쳐 주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컨트랙터가 아닐지라도 (지금은 좀 무섭지만) 잘 지내고 싶었다. 더 눈에 들고 싶어졌다.


“으휴…”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무서운 표정을 지우고선 선심을 쓰는 듯, 어느 로우 앞으로 데려갔다. 뒤따라가며 히로에겐 귓속말로

“저 사람은 아마 츤데레야.” 라고도 말했다.


“잘 봐요. 왜 이런 것도 안 배워 온 거야.” 투덜거리듯 말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따라고. 그리고 이런 건 과감히 버리고.”


미니멈 농장에 왔으니, 이 농장만의 법을 따라야 했다. 열매를 따는 방법부터 시작해 솔팅할 때 어떤 것들이 걸러지는지, 가지 정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 그러다, 조금 전 점심시간에 히로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곳 컨트랙터는 말이 빠르고 이해하기 어렵다며 말하는 히로를 보고 잊고 있던 진짜 나의 역할이 생각났다. 히로는 아직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라 쉬운 말로 다시 돌려 말해줘야 한다고 컨트랙터를 향해 잠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다시 허리띠를 조여 맸다.


손을 털며 “할 수 있겠죠? 이제 할 수 있을 거야”라며 묻는 그는 살짝 웃었다.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어렵사리 본 미소에 보답해야 한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아마 오늘이 첫 출근이자 마지막 출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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