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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만났을 때

휩쓸리지 않는 마음

by euuna






- 좋지 않은 날씨가 가장 좋을지도 모르는 서퍼들



셰어 하우스로부터 20분이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바다에 가면, 종종 서퍼를 볼 수 있다. 서핑 경험이라곤 딱 한 번 뿐이라 서핑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거센 파도가 칠 때에도 바다로 나가는 서퍼들을 보면, 그들은 진정으로 짜릿함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설 수도 없어 보이고 위험해 보이는데. 그 불가능함에 뛰어든다. 그들은 그게 좋아서 한다.

미니멈 아울리 농장의 휴일이었다. 오랜만에 여러 팀이 피스 레이트 농장에 모였다. 얼굴만 알고 지내던 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벌써 미니멈 아울리 농장에서 고정 워커로 일한 지도 꽤 됐다. 농장 일도 많이 적응되었다. 안정적인 양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에, 걱정으로 긴장 서려 있던 불과 몇 주 전의 모습이 아주 옛일처럼 느껴졌다.

얼마 전, 새로 들어온 워커 친구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딸 수 있냐며 물었다. 그 당황스러움이란. 손사래만 연신 치다, 여태껏 도움받은 이들이 생각나, 변변치 않은 제 방법을 알려줬다. 딴딴한 연둣빛 블루베리가 통통한 푸른빛으로 무르익듯, 이 생활에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농장은 시즌과 시기가 무척 중요하다. 시즌마다 작물이 다르고 시기마다 변동이 컸다. 우리가 울굴가로 왔을 무렵만 해도 블루베리가 한창 철이었는데, 머지않아 막이 내릴 듯 보였다. 로우를 끝내고 나오는 시간이 빨라졌고 (실력의 문제는 아니다.) 주변 워커들 사이에서 농장 이동에 대한 주제가 자주 올랐다.

“그거 들었어? 은영 언니 우리 컨트랙터한테 연락받았대.”

점심을 먹던 한 워커 친구가 말했다.

“무슨 연락?”

밤사이 이슬 때문인지 아직도 무른 땅 때문에 바지가 축축이 젖어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서진의 집에 함께 사는 은영이 컨트랙터로부터 연락받았다고 한다.

“킬로그램 더 못 늘리면 잘릴지도 모른대.”

“뭐? 갑자기?”



- 이름 옆, 기록되는 블루베리 양



은영이 받았다는 연락은 컨트랙터의 개인적인 결정이 아니었을 거다. 블루베리를 가장 가까이서 대하는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시즌이 끝나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주일 전과 달리 풍성하지 못한 군집, 열매의 사이즈, 상태를 보고 있으면 막바지의 열매를 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농장은 압박할 테고

회사 내에서는 워커를 줄이려 할 것이다.

수급을 균형 잡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성적이 낮은 워커들을 정리해야 했다. 아래에서 위로 점차 워커 수를 줄여 나가는 거다. 컨트랙터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은영이 어제 하루 종일 울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진은 내게 말했다.

“바로 잘리는 일 아니잖아?” 뜨거운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런 연락까지 받을 정도라면 확정된 거 아니겠어?”

“기한 같은 건 안 줬대?”

“2주 정도? 갑자기 어떻게 속도가 확 늘 수 있겠어. 초반도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앞서 어느 정도 일하다 보면 스스로가 체감하게 된다. 어느 정도 땄는지, 앞으로 얼마큼 따면 될지. 생각하는 동시에 행동도 따라온다. 할당량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면, 몸이 할당량까지만을 목표로 삼는 게 문제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와 다르게, 한 수준 높아졌다고 거기서 조금 더 높이는 게 어려워졌다.

“요즘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하는 건, 줄 세우기야.” 서진이 덧붙였다.

“그다음은 누가 연락받을지 자기들끼리 정하고 있어.”

서진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였다. 같은 팀이다 보니, 서로 간의 속도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은영을 시작으로 불안한 워커 친구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대략 계산하는 듯했다. 탑 픽커들과 함께 사는 나와 히로에게 이 이야기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서진의 집에는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린 듯했다.

“그 이야기 듣고 나니까 나는 어느 위치쯤 되는지 생각하게 되더라.” 서진이 말했다.

“…” 찰나, 나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탑픽커를 제외하고, 우리 팀 내에서 은영은 농장에서 일한 지 시간이 꽤 된 친구다. 그런데도 은영은 여전히 아슬한 안정권 라인의 끝자락이었다. 은영을 생각하면, 독특한 아침 인사가 떠오른다. 아침으로 뭘 먹었는지 묻고 나면, 어제는 얼마나 땄는지 물어본다.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인사를 붙이는 친구들의 수준을 전부 꿰고 있어서 ‘어제 꽤 땄더라?’, ‘몇 킬로나 땄던데?’같이 엄청난 기억력을 자랑해 보인다. 어떤 날은 제 실력을 한탄하고, 누군가와 비교하며 안심하기도 했다. 은영과 로우를 함께 타면, 라디오 게스트로 참가한 기분 또한 느낄 수 있었는데, 내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도가 더딘 게 당연했다. 설령 잘린대도, 미니멈 아울리 농장에 갈 수 없게 되는 거라, 얼마 남지 않은 페이 슬립은 피스 레이트 농장으로 가서 마무리해도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잘린다고 단념하기에는 이르지 않지 않나 싶었다.

다음 날, 아울리 농장이 또 오픈을 하지 않았다. 열매가 자랄 시간도, 로우를 정리할 시간도 필요한 듯했다. 또다시 피스 레이트 농장에 모인 이들은 제각기 볼멘소리를 냈다. 내일은 출근할 수 있는지, 회사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지. 크고 작은 분열이 일어났다. 로우를 돌다 보면, 다른 사람 간의 대화를 많이 듣게 된다. 등을 맞대고 하는 일이니, 듣고 싶지 않더라도 들리기 마련이었다. 어쩌다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계속 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없지만, 절대 비밀스러워질 수 없는 곳이 바로 농장이다.


- 행복한 점심시간



그날 저녁, 우리는 작전을 하나 세웠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니멈 아울리 농장에서 잘리기 전에, 다른 농장 일을 구해보자는 야심 찬 작전. 얼마 전, 서진의 셰어 하우스에 놀러 가, 미아라는 일본인 친구를 만났다. 일본인을 오랜만에 만난 히로는 미아와 한참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히로는 미아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줬다. 미아는 미니멈 아울리 농장에서 일하면서 다른 농장을 찾았다고 한다. 미아에겐 경력이 있었고, 다행히 농장에는 자리가 있어 금방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서진과 히로 그리고 나는 솔깃했다.

콥스 하버에는 유명한 두 농장이 있다. 하나는 온라인 신청하고 하나는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셋이서 쓰는 데이오프였다. 차가 없는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탔고 내려서 걷고 또 걸었다. 어느새 오후였다. 드디어 오피스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우리를 향해 걸어 나온 남성이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 새로운 농장에 갈 수 있을까?



“무슨 일이야?” 그는 물었다.

“안녕, 우리는 블루베리 픽커야. 지금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고 있어. 괜찮다면,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각자의 이력서를 안고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미안해. 우리는 지금 워커가 필요 없어.”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력서라도 받아 줄래?”

허둥지둥 각자의 이력서를 꺼내 쥐여 주고는 돌아서 나왔다. 콥스 하버에서 발품은 처음이었다. 좋은 경험으로 치고 말 일이 될지도 모르고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르는 시도였다. 더 대화할 수 없는 상황에 아쉽긴 했지만, 어쩐지 오랜 시간 걸으며 묵혀있던 답답함이 정리되어 갔다. 하염없이 걸어보는 게 얼마 만이더라.

한 파도를 넘겼더니 곧이어 금세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온다. 몇 번을 타야 어느 높이가 오더라도 덜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제쯤 가뿐히 올라타 볼까? 완벽한 자세로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올라타다 꽈당 넘어져 버리기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도 기어코 다시 올라와 또 탄다.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 오는 파도를 보고서는 응원으로 바뀌어 버린다.

역경이 역경만으로 기억되지 않길. 한 번 빠지고 말일. 떨어지면 다시 올라오면 된다는 그런 서퍼의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 숲 길도 지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작은 오리도 봤다.



다음날. 오랜만에 팀원들과 함께 펍에 갔다. 모두가 바깥 음식은 오랜만이었는지라, 말없이 제 앞의 그릇을 해치우기에 바빴다. 동고동락한 지도 벌써 한 달 반이 지났다며 이야기를 싹 틔워갔다. 그 덕에 지난날들을 함께 돌아봤다. 하루빨리 페이 슬립을 채우고 떠나야 하지만, 이럴 땐 시간이 잠시 멈춰도 좋겠다 싶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혹시 미니멈 아울리 농장이 잘리면, 어떻게 할 거냐며 운을 띄웠다.

“서진 언니, 이야기했어요?” 서진의 룸메이트가 물었다.

“무슨 이야기?” 내가 물었다.

“아직 말 안 했어요?” 룸메이트는 아무런 말 하지 않는 서진을 바라보았다.

서진은 눈을 피했다. 어리둥절했다. 그러더니, 서진의 룸메이트는 서진을 향해 ‘다 같이 갈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빨리 이야기해야죠.’ 하는 거다. 답답했던 내가 ‘어디 가기로 했냐’며 물었다.

“저희 다른 농장에 가려고요.” 서진의 룸메이트가 대답했다.



- 놀라운 이야기를 들으며 먹은 맛있었던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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