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기 위한
“그럼, 이제 라즈베리를 딴다는 거야?” 서진이 물었다.
“아직은 아닌 거 같아.”
“라즈베리도 미니멈 아울리 농장으로 갈 수 있는 건가?”
머리를 맞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블루베리만큼 잘 적응할 거라는 결론. 굼뜨게 지내다가 이도 저도 못한 상황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열매가 없으니 바스켓 채우기가 점점 어려워져 갔다. 이제 블루베리 픽킹 끝물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할까?” 내가 물었다.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네… 불안하긴 해.” 서진이 대답했다.
걱정스러운 이야기만 나누다, 서진은 제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로가 골똘히 생각하다 말을 꺼냈다.
“근데 떠날 거라면, 빨리 떠나는 게 맞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만큼 좋은 조건에, 깨끗한 숙소에, 이렇게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만나서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채워야 할 페이 슬립은 꽤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합격 연락을 받지 못 한 우리가, 떠난대도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남아 있어도 걱정, 떠날려 해도 걱정이었다.
“여기처럼 괜찮은 곳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내가 말했다.
“그건 가 봐야 알지.”
히로는 가끔 우리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잔걱정이 많은 친구였지만, 큰일 앞에서는 되레 침착해지는 사람이었다. 사소한 걱정들로 머리를 싸맸고 그 덕에 두통도 배앓이도 곧잘 찾아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뒤돌아보지 않는 결단력은 닮고 싶을 정도로 부러운 능력이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걱정은 항상 있었어.” 맞는 말이다. 역시 걱정 많은 사람은 다르다.
“정했으면 빨리 가자. 더 늦기 전에.” 두 번째는 조금 덜 무서울 일이었다.
-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이 될 지도 모를.
서진과 히로, 그리고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다음 행선지는 타즈매니아였다. 호주의 남쪽에 있는 섬. 호주에서 유일한 섬 주이다. 광활한 자연이 펼쳐진 커다란 타즈매니아. 콥스 하버에서 시즌이 끝날 무렵, 타즈매니아에서는 블루베리 시즌이 시작된다. 블루베리계의 대기업, 그곳이 타즈매니아에 있었다.
다음 날, 일을 마치고 서진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서진이 찬성할 만한 결정이라 생각했다. 사실 우물쭈물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닌가 싶었다. 떠나는 이야기를 꺼낼 때면 가장 머뭇거려 보이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시즌 마감이라는 이유만 아니었더라면, 굳이 떠날 이유가 없는 곳이니까. 그래도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한 걸 후회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기다리던 점심시간. 빠른 발걸음으로 서진의 곁에 앉았다.
“우리 타즈매니아 가는 거 어때?.” 서진에게 말했다.
“그래, 연락이 오면 가기로 했잖아.”
“아니. 미리 가자.”
연락을 기다렸다가 가기에는 늦었다. 시즌인 만큼 많은 사람이 몰릴 터였다. 게다가 블루베리 계의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뛰어다니며, 발품도 팔아야 했고 살 집도 구해야 했다. 언제 연락이 와도 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돼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워커가 되고 싶었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너네끼리 가.”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어리둥절한 채, ‘타즈매니아에 가고 싶었던 거 아니냐’라고 물었다.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지고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갔다. 섣부르다고 생각하는 걸까. 서진이 먼저 꺼낸 이동 이야기를 내가 너무 주도권 잡듯 한 걸까. 의문이 둥둥 떠다녔다.
“같이 가자. 올라오는 공고도 타즈매니아가 정말 많더라. 가서 직접 컨택도 해 보고. 이제 경력도 있고 하니까…”
“왜 갑자기 그래?”
서진에게는 내 제안이, 하룻밤 사이에 떠나고자 마음먹은 판단이 섣부르고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함께 상의하던 사이였는데.. 하루아침에 저 혼자 마음먹고는 떠나자니. 당황스러울 터였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 싶어, 서진이 가고 난 후 히로와 나눈 이야기, 그리고 잠을 설쳐가며 키웠던 고민들, 검색하고 찾아본 농장 정보에 대해서 털어놨다.
- 서진과 나의 손가락
서진은 웃으며,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어젯밤 히로와 나눈 대화는 짧았지만, 서진에게는 자신을 빼놓고 이동을 도모한 것처럼 보였다. 오해할 만했다. 하지만, 같이 시작한 길을 끝까지 같이 걷고 싶었다. 서진을 두고 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말도 안 된다는 말만 계속해서 나왔다. 서진만 두고 간다면 내내 마음이 불편할 일이었다. 더군다나, 농장의 상황 또한 좋지 못해, 더욱 마음이 쓰일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리 설명해도, 서진의 마음은 굳게 닫힌 듯했다. 큰 실수를 한 기분이었다. 시간을 돌려서, 다시 제대로 분위기를 잡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왜 급하게 점심시간에 말해버렸을까 후회됐다. 덧붙여가며 설명하는 내 말에 서진은 ‘생각해 볼게.’라고 대답하고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열매가 많은 날은 오로지 블루베리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없는 날은 유달리 몸도 정신도 더 피곤했다.
- What’s in my bag
며칠이 지나도 서진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이제 라즈베리로 작물이 바뀐다는 공지도 내려졌다. 히로와 서진이 같은 로우를 탈 때면, 히로는 서진을 설득하기에 바빴다. 어느 날, 히로에게 우리와 커피 클래스를 함께 들었던 일본인 친구, 시호가 연락이 왔다.
“오랜만이야!” 시호는 동갑내기 친구였고 서진과 나는 그녀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멜버른에 있던 시호와는 종종 SNS로 안부를 물으며 지냈다. 우리가 지내는 농장은 어떤지, 일이 어렵지는 않은지 묻기도 했었다. 시호도 세컨드 비자를 만들고 싶어서 정보를 얻고자 연락했다고 한다. 한 달 전이었더라면, 여기로 오라며 불렀을 테지만, 우리도 곧 떠날 상황인지라 함부로 권하기 어려웠다.
“우리 타즈매니아에 갈 생각을 하고 있어. 괜찮으면, 올래?” 히로가 물었다.
늦은 시간까지 히로와 시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시호는 타즈매니아 이동을 함께하기로 했다.
“서진이도 같이 오는 거야?” 시호가 물었다.
- 타즈매니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커피 클래스를 들었을 때, 서진이 가장 아끼는 친구가 시호였다. 시호가 온다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그날은 오랜만에 셋이서 로우를 함께 타고 있었다. 마주 보며 따던 히로가 서진에게 말했다.
“서진, 시호도 온대. 더 재미있어질 거야. 같이 가자. 응?”
“아니, 나는 조금 더 고민해 볼게.” 서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서진과 작별이 머지않은 듯했다. 함께 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지 않을 거 같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