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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없는 선택

선택의 연속

by euuna








“너희, 어디 가?” 답답했던 내가 물었고

“다른 농장에 가려고요.” 지원은 대답했다.


세컨드 비자를 만들러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때, 이 커다란 나라에서 서진과 떨어진다는 게, 혼자가 되어버린다는 게 이상하리만큼 긴장되지 않았다. 언젠가 그날이 올지도 모를 거란 생각과 그럼에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마 내가 세컨드 비자를 만들러 가겠다고 말했을 때, 서진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싶었다.


“갑자기? 어디로?”

“집에 가서 말해 줄게.” 서진이 대답했다.


펍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왜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피어오르고 곧이어 섭섭함과 서운함이 물밀려 왔다. 불과 하루 전, 새로운 농장을 찾자며 같이 길을 나섰는데. 이유가 있겠지 싶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대화 한 마디 없었다. 나는 뭐라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싶으면서도 서진이 화가 난 건가 싶기도 했다. 깜깜한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방으로 들어와 각자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었던 때, 서진이 빨랐다.



- 별 보기 쉬운 호주 시골



“다른 농장, 그거 그 친구가 멋대로 신청한 거였어.”

“뭐?” 얼굴이 찌푸려졌다.


말도 안 돼. 이런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었다. 다른 농장을 지원한 것이 잘못된 일인 것처럼 해명하듯 하는 서진이 이해되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 같은 건 솔직한 대화 몇 번으로 금방 사라질 일이었다. 머나먼 곳에 함께 와, 크고 작은 일을 같이 겪었다. 함께 보낸 세월도 10년이 훨씬 넘은 사이였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끝내는 이해하게 될 일인데.


“걔가 마음대로 지원서를 작성해서 넣었다고?”

“응. 나는 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했어.”


개인 정보를 몇 가지나 적어 내야 하는 지원서를 남이 적었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서진은, 룸메이트 등쌀에 못 이겨 신청했다고 덧붙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데 분위기에 휩쓸려 지원했다며 결국 해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서진의 배려였을 테다.


“그러면 너 이동하는 거야?”

“연락이 오면 그럴지도 모르겠어.”

“다른 애들이 말하기 전에 말해줄 수 있었잖아.”

“아직 붙지도 않았고…” 말끝을 흐리는 서진이었다.


그래도 서진이 직접 이야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게 아니면서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서진이 이해되고도 남았다. 불안한 시기였고, 잘릴 사람들을 순서대로 줄 세우기 한다는 그 집 안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서진은 깊이 고민했다. 머지않아 제 차례도 올 거라고 의심치 않았다.


“너랑 히로는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매일 올라오는 성적표를 보고 나는 언제 연락받을지 불안해하는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고, "

"그러니까. 그게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얼마 전, 잘릴지 모른다는 은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반응이 썩 좋지 못했던 탓일까. 우리 일이 아니란 듯 굴어서일까. 서진은 꾹 참았던 것들을 쏟아냈다.


히로와 나는 어느새 비슷한 양을 따고 있었다. 좋은 성과를 기록했고 그에 비해 서진이 조금 미흡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나 큰 차이도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아니라서 쉽게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저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게 가까이서 느껴졌다.


미니멈 아울리 농장은 이제 언제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서진이 속앓이하고 있는 건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서진의 일만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 우린 중•고등학생 때 등교 전 자주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 갔었다. ( 호주에서도 쉬는 날이라면 여전히 ! )


“미안해. 네가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받고 있을 거라 생각을 못 했어.” 진심이었다.

“.. 네가 왜 미안해.”

“어디에 이력서 넣었는데? 하우스 메이트끼리 갈 거야?”

“모르겠어. 큰 농장이 있다고 해서 넣었어. 너희도 한 번 넣어봐.”


서진은 글썽이던 눈물을 닦고는 제 폰으로 회사 이름을 검색해 보였다. 블루베리 계의 대기업이라 들었다며 알려준 이곳은 비행기를 두 번이나 타고 이동해야 하는 곳이었다.


“붙으면 같이 가자.” 내가 말했다.

"응.. 제발 붙었으면 좋겠다." 서진이 대답했다.

“그래! 다 같이 가자.”


무거웠던 분위기를 풀려는 듯 히로가 서진에게 장난을 치며 말했다. 그렇게 길었던 하루가 지나갔다.



- 손가락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저 정도가 최선이었다.



조용하던 우리 집에서도 좋지 못한 농장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들이 정해진 듯했다. 탑픽커들이 떠난다는 거면, 여긴 이제 가망이 없단 건가 싶었다.


그날도 피스 레이트 농장에 출근했던 날이었다. 이곳에 오면 힘들긴 해도,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 즐거웠다. 솔팅을 하던 중, 컨트랙터가 나지막이 불렀다.


“혹시, 친구들이랑 같이 이동할 계획 있어요?”

“네? 다른 농장으로요?” 이렇게나 뜬금없이 대놓고 물어본다니, 괜찮은 건가?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어려웠다.

“네. 생각 있어요?”


어디까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고민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전혀 없다고 해야 할까? 이미 다른 농장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되는 걸까?


“솔직하게 말해봐요!”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그는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민하고 있기는 해요.”

“그럴 줄 알았어! 어디로 가려고요?”

“아직 안 정했어요. 그냥 농장 상황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 해서…”

“괜찮아요.”


아직 페이 슬립이 많이 남아서 걱정스러울 법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자신의 바스켓에 있는 블루베리를 내 트레이에 옮겨 담았다. 우리 팀 컨트랙터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성격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워커 개개인을 존중할 줄 알았고 어떤 상황이든 유연하게 넘어갈 줄 알았다. 조금 더 솔직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설마 저 경고 연락받는 거예요?”

“하하하 아뇨.”

“근데 갑자기 왜 물어보셨어요?” 가자미눈을 하고서는 물었다.


그는 블루베리 시즌이 곧 마감된다고 했다. 그러면, 이제 라즈베리로 넘어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라즈베리라니. 블루베리보다 조금 더 어려운 작물이었다. 가시가 무성하고 따는 방법도 완전히 달랐다. 라즈베리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언제부터요?”

“그건 잘...”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래 열매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어찌 되었든 확실하게 떠날 마음이 벌써 반 이상은 차올랐다는 거였다.



- 피스 레이트 농장에서는 이렇게 많은 소들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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