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섬, 타즈매니아 첫인상
밤 열차에 몸을 싣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등 언저리가 불편해, 몇 번을 뒤척이나 깨고 자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시드니였다. 시드니는 이번이 두 번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도시! 고요하고 조용하던 울굴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붐비고 시끄럽고 활기찼다.
- 열차 안에서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고작 한 달 반 만인데, 새로웠다. 그럴 만한 게, 울굴가에서 커피는 딱 두 번 정도 마셨다. 매일 커피를 달고 사는 나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카페를 나와, 하이드 파크로 갔다. 호주 벚꽃이라 불리는 자카란다가 한창이었다. 곳곳에서 진한 꽃내음이 풍겨왔다.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가며 걷다, 앉아보고 누워도 보며 여유를 실컷 만끽했다. 대성당을 둘러보고 나와, 주립 미술관에도 들렸다.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 롱블랙이랑 샌드위치 & 라떼랑 요거트
- 호주에서 처음으로 갔었던 공원. 서진이 생각났다.
- 어딜 가더라도 미술관은 꼭 가보는 게 좋다
- 날이 좋은 시드니
영사관으로 가, 영문 운전면허증 서류를 발급받았다. 혹시나 한 마음에 신청해 둔 거였다. 시골에서는 차 없이는 정말 무리였다. 이제 와서 후회되는 게 하나 있다면, 한국에서 운전 연수를 한 번 더 받고 오지 않은 것과 해외 운전면허증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렇게 차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오페라 하우스 구경을 마지막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호주에서 타는 두 번째 비행기. 콥스하버로 가는 비행기를 탔을 적에만 해도, 멜버른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가 아닌, 여행을 목적으로 가는 곳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해서 비행기를 탈 일이 또 생기려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그날이 빨리 왔다.
타즈매니아로 향하는 비행기 안,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대각선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독서하고 있는 할머니, 그 옆으론 게임 중인 아저씨, 그리고 신문에 있는 스도쿠에 열중한 할아버지. 그러다, 난 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내 여정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싶었다.
호주에 온 지도 벌써 7개월이 지났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살 때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거 같아,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었다. 픽커 일을 시작하고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까 봐, 뭣 몰라 일을 그르칠까 봐 긴장해 가며 지냈다. 작은 걱정 하나 드디어 벗어나는 건가 싶었더니, 또 새로운 늪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벗어나고, 연연하기도 했다가 다시 돌아보는 일의 연속이었다. 어디에 가도 마음 하나 둘 곳 없다 느꼈던 때, 그런 건 장소가 결정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됐다. 어딘가에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어디서나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들을 이어가고 있다 보니 착륙이 곧이었다. 말로만 듣던 호주의 섬, 타즈매니아에 왔다!
짐을 찾고 의자에 앉아 시호를 기다렸다. 저 멀리 낯익은 카디건이 보였다. 숨 막히는 포옹을 오랫동안 나눴다. 시호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 헤어진 지 얼마 안 됐거든?” 시호를 떼어내며 말했다.
“그래두… 반갑잖아…” 여전히 귀여웠다.
애초부터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는지라 타즈매니아에 대한 정보라고는 이곳 호바트가 타즈매니아 주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점과 농장에 관한 게 다였다. 걸으면서 보는 이곳의 풍경은 정말이지 호주답지 않은 호주였다. 낮은 산들 위로 층층이 이루어진 마을들, 거리마다 귀여운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치 미니어처 세상 같았다. 얼마 안 가,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타즈매니아 바람은 너무 찼다. 여기는 호주 본토보다 남극에 훨씬 가까운 지역이다. 남극해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이 시원하다 못해 차가웠다.
반가움도 잠시, 커다랗고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 이끌고서 언덕을 올랐다. 간만인 시호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시호는 케이팝 아이돌의 오랜 팬이라 한국어를 꽤 잘했다. 그런데, 한국어로 인사 정도만 할 줄 알던 히로가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에 끼자 깜짝 놀랐다.
“너 뭐야. 한국어 실력 무슨 일이야?” 시호가 한국어로 물었다.
“나? 한국 사람들이랑 일하면서, 좀 말할 수 있게 됐다이가.”
그 한국 사람들이 하필 경상도 사람들이라는 게 웃기지만
언덕의 꼭대기, 저 멀리 보이는 멘션이 우리가 며칠동안 지낼 곳이었다. 배정받은 곳은 3층이었다. 가장 높은 층이라 멋진 뷰를 보겠다며 은근히 들떠 있는데, 데스크에서 짐이 많냐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말과 함께. 언덕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각자 백팩을 둘러매고 30킬로 가까이하는 캐리어를 쥐고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시호는 중간중간 쉬어 가며 올랐고 나는 한 번에 끝내는 게 낫다고 핏대를 세우고서 올라갔다. 저 아래 캐리어에 앉아 쉬고 있는 시호를 보다 못한 히로가 데리러 갔다. 방에는 세 개의 침대와 아주 작은 창이 있었다. 뷰를 보기는 글렀다 싶었다.
간단히 짐을 풀어두고 밖으로 나갔다. 미처 다 구경하지 못한 거리를 돌았다. 모형으로 만들어진 마을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저녁에는 예뻐보이는 레스토랑으로 가 식사와 함께 와인을 마셨다.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가 난무한 방에서 우리는 각자 침대로 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 힘내라 힘 !
- 예상과 달랐던 창문. 그래도 예뻤다.
밤사이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일어나자마자 배가 무척 고팠다. 아침부터 비가 쏟아져 내려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말도 없이 나눠 먹고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내로 나와 걷다가, 비가 더 심하게 쏟아지길래 카페로 피신을 왔다. 호바트에서의 첫 카페, RETRO. 여기는 시호의 최애 카페로 등극하게 된다. 이곳 당근 케이크는 정말, 정말 맛있다. 생각하면서 글을 쓴느 지금도 살짝 침이 고일 정도로… 은은한 시나몬 향과 촉촉한 시트. 쫀득하면서도 부드러운 크림이 신의 한 수였다. 평소 케이크를 즐겨 먹지 않는 나도 어떻게 이렇게나 맛있냐며 포크 쥔 손을 멈추질 못했다.
나오는 길에는 우박이 내렸다. 우박이라니. 새로운 마음으로 새 시작을 하기에 앞서, 히로는 복권을 사도 되겠냐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걸 왜 우리한테 물어보냐며, ‘당첨되면 누나들이랑 n빵 하는 거야. 알지?’했더니 재빠르게 한국말로 받아 쳤다.
“뭔 소리야.”
더 이상 한국어를 그만 가르쳐 줘도 될 듯했다.
- 낙첨
숙소로 돌아가 모여 앉아서 셰어하우스와 농장을 찾기 시작했다. 궁금한 걸 묻던 시호는 메모장을 켜 받아 적었다. 농장 일을 하기 전 준비물과 어떤 조건의 농장이 좋은지, 주의해야 할 사항들 등. 한 달 반 경험에도 경력이 새겨졌다.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시호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책임감이 느껴졌다. 괜찮은 농장을 추려보다 첫 지원을 넣었다. 일찍이 끝낸 나와 히로는 시호의 옆에 앉아 작성을 도왔다. 완료 버튼과 함께 감사 인사가 화면에 가득 찼다.
“아~ 드디어 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일어난 시호는 침대로 가 누웠다.
“…뭐해?”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다, 갑자기 누워버리는 시호를 보며 히로와 내가 물었다.
“끝난 거 아니야?” 두 다리를 쭉 펴고는 침대를 통통 쳤다.
농장 물정 모르는 시호였다.
자리로 끌고 와 앉히고서는 절대 하나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며 웃음을 꾹 참고 으름장을 놓았다. 시호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잠시 짓다가 다시 찾기 시작했다. 작은 섬이라지만, 타즈매니아도 매우 컸다. 아직 결정된 게 없어 우리는 호바트에 더 머물기로 했다. 저렴한 숙소도 함께 찾았다. 이제부터는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 농장을 찾는 어플이 귀여워 좋다는 시호 ..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언덕을 끝도 없이 내려갔다. 두 번째 숙소는 무려 1915년에 건축되었다는데 이를 증명하듯 빈티지하고도 예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곳이었다. 이곳의 큰 장점은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코인 세탁소가 있다는 거였다. 빨래가 미어터져 가고 있었는데, 잘된 일이었다. 낮잠을 자겠다는 시호의 옷가지도 몇 벌 챙겨 히로와 세탁소로 향했다.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작은 리큐어 가게가 있었다. 빨래를 기다리는 동안 마시려고 맥주 두 캔도 샀다.
- 올라 와 보니 장관
작은 세탁소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세 대씩 놓여있었다. 마주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도 벽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벽에는 창이 하나 있었는데, 창 바로 옆, ‘Please press for service’라고 적힌 종이가 벨과 함께 붙어있었다. 세탁기는 잠시 잊어버리고 창 앞으로 가 섰다. 창 너머에는 펍이 있었다. 간단한 스낵과 맥주를 즐기는 몇 사람이 보였고 바로 아래로는 점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컵을 닦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어쩌다 주문까지 마쳤다.
순간,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다. 세탁을 기다리는 동안 맥주라니. 세탁소에서 시켜 먹을 걸 왜 리큐어 가게에 갔을까. 정말 난들 알았겠냐는 말이다. 생각지도 못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누구나 할법한 생각을 실행에 옮겼을까. 세탁소가 먼저일까. 펍이 먼저일까.
- 사온 것과 방금 산 것
숙소로 돌아가 다시 농장 검색을 시작했다. 타즈매니아에서도 농장이 유독 많이 모여 있는 위치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몇 번 들어본 듯한 이름 있는 농장들은 전부 호바트와 거리가 멀었다. 블루베리 대기업이라 불리는 곳 역시 같았다. 이제 곧 호바트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고 귀여운 마을을 떠난다는 게 어쩐지 아쉬우면서도, 다른 곳은 또 어떤 곳일지 무척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