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나날들
데본포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데본포트에 가기 위해선 론세스톤을 경유해, 대략 5시간을 달려야 한다. 멀리 펼쳐진 산 능선, 끝없는 하늘, 넓게 펼쳐지는 강을 바라보다 잠에 들었다.
데본포트의 첫인상을 표현하자면 ‘한적하다’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그냥 별게 없었다. ‘진짜 시티?’ 이런 반응이 나오는 곳. 버스 정류장에 앉아 고개를 휘휘 돌려가며 둘러봤다. 정말 별거 없는 곳인 걸 확인하고서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픽업을 나오기로 했던 집주인, 파울리가 도착했다.
파울리는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였다. 깔끔하게 올린 헤어 스타일에, 팔다리 빼곡히 문신을 가지고 있는 호주 사람이다.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긴 팔을 흔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가와 무거운 캐리어를 덥석 들고 차에 실어 주었다. 필요한 걸 사러 가자는 말에 오랜만에 쇼핑했다. 울굴가에서 싸 온 많은 라면만 내내 먹었더니, 당장 먹을 게 없었다.
다음 날, 운전면허증을 호주 면허증으로 전환하러 갔다. 핼러윈 데이라고 아침부터 들떠 있는 시호는 가는 김에 겸사겸사 파티 준비물도 사자며 팔을 끌었다. 그래서 핼러윈 파티 겸, 새 하우스에 도착한 기념 파티를 열기로 했다.
핼러윈 느낌의 선글라스와 호박 모양 초 그리고 도넛을 샀다. 시호가 너무 즐거워 보여서, 혹시 남의 집 대문도 두드리러 가자고 하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시호는 무슨 말이냐며, 우리끼리 하는 소소한 파티라고 웃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히로는 감자 그라탕을, 시호는 카레를 만들겠다고 요리를 시작했고,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했다. 냉장고 청소.
- 세상에서 냉장고 청소가 제일 쉬웠어요 .
- 시호표 유령 카레
호화로운 식사를 마치고 사진도 찍고 놀다가, 뒷정리도 마쳤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좀 쉬자며 방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간 지 1분도 안 돼, 시호는 우리를 불렀다.
시호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누구보다 낭만과 로망을 잘 안는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시호에게서 가장 닮고 싶었던 게 있다면, 작은 것들을 소중히 하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거 봐. 너무 예쁘지’하는 시호의 목소리를 들으면, 별다른 생각이 없다가도 그게 참 예뻐 보이게 된다.
시호는 셰어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방을 아주 열심히 치웠다. 이제 보니까, 커다란 창을 가리던 물건들이 전부 사라졌었다. 히로와 나를 부른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다. 시호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창밖이었다. 창밖으로 지고 있는 해, 그리고 활짝 핀 장미. 예뻤다. 행복했고 따뜻했고 즐거웠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 영화 장면 같은 시호의 방
집주인 파울리도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다. 우리의 사정을 살펴주고, 필요한 건 없는지, 도와줄 건 없는지 수시로 물었다.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날에는 종종 이야기도 나누었다. 심심해 보이는 히로에게는 낚싯대를 빌려주었고 어느 저녁에 베이킹을 하던 시호와 나를 본 건지, 출근 전 베이킹 도구들을 전부 꺼내 두곤 쓰라며 메시지를 남겨두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 곧 연락이 올 거야. 농장에서 이제 막 새로운 사람들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파울리는 이곳에 오래 산 걸 증명하듯, 우리가 부르는 농장의 이름들은 웬만큼 다 알고 있었다. 그는 농장에 관련된 소식을 듣고 온 날이면 꼭 우리에게 알려주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꼭 메시지를 보내왔다.
‘잘될 거야. 너무 조급해하지 마. 오늘도 좋은 밤 보내’
서툰 영어 실력이라 짧은 답장에도, 아침에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낼 예정이야? 너희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 문제가 생긴다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알려줘. 항상 도움이 되길 바라.’
파울리는 내게 헤이즐이라는 이름을 주었던 멜버른에서 만난 선생님, 피오나만큼이나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매일 같이 보내오는 그의 응원에 힘입어 구직도, 잘 먹고 잘 쉬는 것도 열심히 했다.
우리가 사는 집에서 25분 거리에는 바다가 있었다. 울굴가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든 바다가 바다라고 불려도, 그 모양새는 모두 다르다. 울굴가 바다와 데본포트 바다는 정말 달랐다.
울굴가 바다는 한적하고 자연 그대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진한 푸른색의 파도를 보고 있자면, 계속해서 멍하니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은 그런 느낌이다. 데본포트의 숙소와 가까운 바다는 휴양지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은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온 건지 싶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바다를 즐기고 있는 걸 본 적도 있었다. 고요해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게 울굴가라면, 데본포트에는 거침없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아무튼 비슷한 거 하나 없어도 그 아름다움은 매한가지였다.
우리는 틈만 나면 바다에 갔다. 오죽하면, 엄마와 안부 전화를 할 때마다, 바다에 있으니, ‘거긴 그렇게나 할 일이 없냐’라고 물었다.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바다만큼 기분 전환하기 좋은 곳이 없었다. 그곳에 가면, 귀한 커피도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걸어서 또 바다에 가고, 어떤 날은 바다가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 보기도 하며 자주 갔다. 한적하고 평화롭고 재미있는데 그래도 지루했다. 얼른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 기다리는 시호
중이었지만, 연락받기가 쉽지 않았고 울굴가에서부터 가져온 호기롭던 마음가짐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히로와 시호도 점점 지쳐갔다. 조급해하지 말자며 서로를 다독이며 지냈다. 하지만, 시호의 마음은 우리보다 더 불안했을 것이다. 아무런 경험이 없고, 모아둔 돈도 없으니 밝은 성격의 시호는 겉으로는 잘 웃고 지내도, 종종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곤 했다.
블루베리 계의 대기업에서 이력서를 제출하고 추후 일정에 대해 알려주겠다는 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연락받은 지도 꽤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직접 찾아가는 게 답일지도 모르겠다며, 이른 아침부터 짐을 꾸려 나갔다. 한 번 해본 일이라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일하긴 정말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처럼 일찍이 모여 있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겨우 사무실을 찾은 우리는, 경직된 표정을 억지로 풀어가며 어필을 하고 나왔다. 모두가 간절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방청소를 막 끝냈을 즘, 시호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더니 들어왔다. 밖에서 요거트를 먹던 히로도 영문 모른 채 따라 들어왔다. 좀처럼 보기 힘든 어두운 표정의 시호였다.
“무슨 일 있어?”
“나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시호는 우물쭈물했다.
“무슨 일인데?” 정말로 저런 난감한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긴 한숨을 내뱉으며 시작된 시호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한적했던 일상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