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사기
“빨래할 거 없어?”
“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세탁소에서 맥주가 먹고 싶은 내가 물었고 오랜만에 나갈 준비를 하던 시호가 대답했다. 우리는 호바트를 떠나기로 했다. 마침, 좋은 조건의 셰어하우스를 찾았다. 호바트보다 위인 데본포트라는 지역에 있는 곳이었는데, 지원했던 여러 농장들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커다란 주택이었다.
어디 농장을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주위에 먼저 정착하자 싶어 옮기기로 결정했다. 혹시 운전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오일 셰어를 구해 차를 얻어 타고 다니는 상황에서도 대비하기 좋은 위치였다. 물론 마트나 쇼핑센터를 갈 때면 배차 간격이 썩 좋지않은 버스를 기다려야 했지만, 시골살이란 그런 거다.
떠나기 전, 아시안 마켓도 한 번 둘러볼 겸, 아쉬운 호바트 탐방도 할 겸 밖으로 나갔다. 박물관과 미술관도 들려줘야 했고 좋은 카페도 한 번 더 가야 했다. 데본포트는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지만, 울굴가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 예쁘지만 레트로 당근 케이크가 최고 !
- 타즈매니아 미술관
시호는 타즈매니아와 사랑에 빠진 지 오래였다. 시골 같기도, 도시 같기도 한 이곳이 마음에 든다며, 어디를 가든 ‘와-’ 소리를 빼놓지 않았다. 듣던 히로는 ‘아무래도 후쿠오카 사람이니까…’라며 조용히 읊조렸다. (오사카에 비해 후쿠오카는 조용해서일까?) 그 말을 시작으로 오사카인 히로와 후쿠오카인 시호는 내내 투닥였다. 그 이후로 함께 사는 동안에도 말이다. 약간의 예의를 차리던 둘 사이가, 오만 정이 다 트고 말아 버린 남매처럼 변해버렸다. (이럴 땐 일본어를 사용했는데, 못 알아들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시호는 자신의 비자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타즈매니아를 떠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타즈매니아에서 살고 있다.
- 호바트 거리들
타즈매니아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밤. 수상한 일이 벌어졌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신 것 뿐인데, 쇼핑으로 분류된 창 안에는 -$195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스크롤을 내려보니, -$196 하나 더 찍혀 있었다. 쓴 적 없는 약 300불이 어느 새벽에 해외 거래 수수료 10불과 함께 사라져 었다.
“얘들아.”
“누군가 내 카드를 브라질에서 쓴 거 같아.”
“뭐?!”
“그것도 두 번이나…”
벌떡 일어난 히로와 시호가 옆자리로 와 앉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나는 어제 새벽에 브라질에 간 적이 없단거다. 아니, 살면서 가본 적도 없다. 누군가가 상파울루에서 야무지게 쇼핑했다. 내 카드로 말이다.
잊을 수 없는 그날 밤. 카드를 정지하고 은행에 문의했다. 호주 사기 문제가 만연하다더니, 결국 내게도 찾아왔다. ‘호주 카드 사기 대처법’, ‘호주 카드 사기 돈 돌려받는 방법’, ‘호주 은행 사기 처리 방법’ 등 검색하다, 사라진 돈을 돌려받긴 어렵다는 절망적인 리뷰를 발견했다. 또 언제 어느 나라에서 빠져나갈지 모를, 남은 돈을 지켜야 했다.
-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
히로의 세이브 통장으로 돈을 옮겼다. 부자가 됐다며 말하는 히로를 흘겨보다 문득 첫 보이스 피싱을 당했던 때가생각이 났다. 중학교 2학년. 가정 시간 때였다. 바느질 수업을 하는 중이었는데, 전날 숙제를 해 오지 않은 나는 곧 혼날 참이었다. 앞으로 나오라는 선생님 말씀에, 망했다는 생각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갑자기 앞문이 열렸다. 어느선생님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으셨다. 매를 안 맞는다는 사실에 기뻐 재빨리 따라 나갔다.
“어머니께서 교무실로 전화했어. 너 학교에 있냐고.”
“네? 왜요?”
걸음을 빨리하는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갔다. 교무실에 계시던 선생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담임 선생님이 이리 오라고 손짓하더니, 수화기를 건네며 “빨리 받아”라고 재촉했다. 나는 수화기를 받아 들고는 엄마를 불렀다. 놀란 목소리의 엄마는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지, 정말 내가 맞냐며 몇 번이고 되물었다. 어리둥절한 채, “무슨 일인데?”라고 되묻기만 했다.
보이스피싱범이 낯선 번호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딸을 돌려받고 싶다면, 이천만 원을 준비하라고 협박했단다.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매 맞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달려 나온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몇 번이고 엄마를 안심시킨 끝에 전화를 끊었고,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주변 사람들의 ‘괜찮냐’, ‘어쩌다그렇게 됐냐’라는 질문은 한동안 내내 따라다녔다.
시간이 지난 뒤, 왜 한 번쯤 보이스피싱 일 거라고 의심해 보지 않았냐는 물음에, 엄마는 말했다.
“의심했지. 네가 울면서 엄마 이름 부르기 전까지는” 이런 나쁜. 이건 여전히 엄마에게 두려운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옆에서 코를 먹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울고 있는 시호였다. 애써 흐르는 눈물을 참으려고 눈을 부릅뜨고는 잠옷 소매로 얼굴을 벅벅 닦고 있었다.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냐”라며 맹맹한 콧소리로 묻는 시호에게 “너는 왜 우냐”라며 물었다.
그런데 시호가 “엄마가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하니까 너무 슬퍼.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는 거다. 시호의 다정한 마음에, 웃음이 그쳤다. 그러게 엄마는 얼마나 놀랐을까. 그날 엄마의 마음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헤아려본 적이없었다.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여전히 눈물을 훔치는 시호를 달랬다. 그동안은 썰처럼 웃어넘겼던 이야기를 돌아보게 되었다. 여리고 따뜻한 일본인, 시호 덕분에. 얼마를 줘도 아깝지 않을, 고작 300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 사기에떨었을 엄마의 두려움이 이제야 느껴졌다.
엄마가 싫어하는 그날을 떠올리면 나는 이제 시호도 함께 생각이 난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를 안아주고 싶다던, 커다란 마음을 내보이던 그날도 함께.
그날 이후로 수도 없이 은행을 방문했다. 그리고 세이빙 통장 개설과 함께 새로운 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렇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브라질, 페트롤리나에서 300불이 빠져나갔다… 끔찍함에 고함을 질렀다. 은행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그러고 보면, 어릴 때 나는 은행을 믿지 못하는 아이였다. 세뱃돈이나 용돈을 차곡차곡 방에 모아두었고 어딘가 나갈 일이 생기면 그 돈을 지갑에 넣어 손수건 서너 장을 꺼내 정성껏 싸고 보자기처럼 소중히 들고 다녔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어느 부활절, 소아과에 진료받고 나오는 길에 캔디와 장식된 달걀 바구니를 선물로 받았다. 가진 게 너무 많았던 탓일까. 동생이 진료받는 동안 놀이방에서 놀다가, 소중히 싸 들고 갔던 보자기만 깜빡한 채 집으로돌아왔다. 뒤늦게 찾으러 갔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하늘의 크나큰 뜻이었을지는 몰라도, 보자기 바보 어린이가 헤아리긴 어려웠다. 엄마는 은행이 왜 필요한지, 왜 믿어야 하는지 설명했고 그 후로는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보자기를 들고나가는지 살피곤 했다.
역시 어린 내가 현명했던 걸까? 정말 은행만 믿고 있을 수 없었다.
몇 개월에 걸쳐, 영문 모른 채 잃은 돈을 돌려받으려 애썼다. (혹시, 호주에서 사기를 당해 검색을 하다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참고하길 바란다.) 호주의 공식 금융 불만 처리 기관으로 ‘AFCA’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금융사, 즉 은행이나보험, 투자회사와 고객 간의 분쟁을 공정하고 무료로 중재해 준다.
은행에는 몇 번이고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AFCA를 알게 되었다. 이 기관은 여러증거 자료와 함께 불만을 접수하면,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조사해 준다. 진행 상황을 꾸준히 메일로 알려주며, 처리가 되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연락이 온다. 덕분에 몇 달간 끌고 다녔던 골칫거리가 해결되었고 얼마 뒤 돈이 들어왔다.
별일을 겪게 해 준 호주 덕에 새로운 지식이 쌓였다. 이제 카드 사기는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또 당할 수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 호주 금융 불만 처리 기관
다음 날, 마지막으로 세탁소를 한 번 더 다녀왔다. 다시는 못 볼 거 같은 세탁소. 한국에서 찾는 건 더 어려울지도 모르는 이곳. 드디어 생긴 빨래들을 돌리며 맥주 한 잔을 건네받고는 영화 한 편을 봤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한 인상을 심어준 호바트도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