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리 집에는 칠면조와 닭 그리고 그의 새끼들, 두 마리의 도마뱀이 있었다. 해가 잘 드는 발코니에는 커다란 소파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에 앉아, 칠면조와 닭, 병아리, 도마뱀을 구경하기도 하고 책도 읽고 게임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후 네 시쯤 되면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데 몽롱한 기분에 껌뻑 졸기도 했다.
파울리의 타투를 구경하며, 저마다 새긴 이유에 대해 듣던 저녁이었다. 파울리는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했다. 디즈니, 픽사, 지브리 등 주인공들이 파울리의 팔다리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에는 ‘폼생폼사’ 한국어도 적혀 있었다. 이런 건 왜 있냐며 한참 웃고 떠들다, 밤이 늦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이 파울리와 함께 한 마지막 날이었다
파울리의 타투를 구경하며 저마다 새긴 이유를 듣고 있던 저녁이었다. 파울리는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했는데, 디즈니, 픽사, 지브리 등 주인공들이 파울리의 팔다리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에는 ‘폼생폼사’ 같은 한국어도 있었다. 이런 건 왜 있냐며 한참 웃고 떠들다 밤이 늦어,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이 파울리와 웃고 떠드는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파울리로부터 내가 문자를 받듯, 시호도 파울리에게 몇 차례의 문자를 받았다. 시호는 가끔 파울리의 메시지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친화력을 지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해, 감사의 답장을 보내고 말았단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점차 도를 넘어섰고 기어코 이런 메시지도 오고 말았다.
‘내 방에서 밤을 같이 보내는 게 어때?’
‘난 네 말동무가 되어주고 마사지를 해주고 싶어.’
‘외롭지 않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이렇게나 저질스러운 메시지가 말이다. 거절의 문자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을 즈음, 파울리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Cuddle Buddy’라는 단어로 선을 넘었다. ‘커들 버디’란 껴안고 자는 사이를 뜻한다. 보통 밤에 함께 자거나, 안고 영화를 보는 등을 하는 사이를 지칭하는 단어다. 커들 버디? 안고 잘게 필요하다면, 곰인형이나 끼고 잘 것이지. 자신도 딸이 두 명이나 있으면서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었다. 시호가 수차례 거절의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기분이 나쁘다는 걸 표현했는데도,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게 대답했다.
“Dosen’t matter” 자신만 상관없는 문제였다.
"이게 무슨..."
"진짜 미치겠어."
“이 아저씨가 미쳤나 정말”
내 속이 아무리 펄펄 끓는대도 시호만 하겠는가.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속이 좋지 않다는 말과 함께 가져온 냉수를 들이켰다. 내내 머리를 싸매 고민하다 보니, 벌써 파울리의 퇴근 시간이 됐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는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시호는 무서웠고 역겨웠고 짜증이 났다. 그날 이후로 파울리가 쉬는 날이면,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려 했고, 혹시라도 화장실을 가는 길에 마주칠까 봐 두려워했다. 아침저녁 식사에도 우연히 파울리를 마주칠까 봐 재빨리 식사를 마쳤다. 밤마다, ‘친구들에겐 비밀로 할게.’하는 이 기분 나쁜 메시지를 보내는 아저씨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싶었다. 이렇게 살 수 없었다.
"우리 이 집 나가야겠다."
- 데본포트에서의 추억들
타즈매니아 농장 정보를 얻기 위해 들어갔던 커뮤니티 방이 있었다. 종종 둘러보며 여러 정보를 얻었고, 아무리 봐도 블루베리 농장에 대한 소식은 얻기 어려웠다. 작물을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무렵, 라즈베리 픽커를 구인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결국 라즈베리인 걸까.
울굴가를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에는 비정기적인 출근, 불안정한 상황, 작물 변동 가능성 등 다양한 문제들이 있었다. 그 문제들을 한데 모아보면 어찌 되었든 '블루베리 농장에서 일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떠났다. 하지만, 아무래도 블루베리만 기다릴 수 없을 노릇이었다. 라즈베리 픽커를 올린 사람은 한인 컨트랙터였다. 지난번에는 운이 좋아, 좋은 컨트랙터를 만나, 괜찮은 환경에서 지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운이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데본포트에서 받은 연락은 단 하나도 없었고, 커뮤니티에서도 데본포트에 있는 농장 구인 글은 찾을 수 없었다. 농장은 많았지만, 찾는 곳이 없었다. 데본포트에 온 지 3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동이라니. 그러나 연락이 올 때까지 더는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릴 곳도 없었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 없어 답답했다. 다시 원점이었다.
시호의 뜻에 따라, 파울리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최대한 무례해 보이지 않게, 심기를 거스르는 듯 보이지 않도록.
‘그냥 장난스럽게, 농담으로 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서로 문화 차이가 있다는 걸 고려해서 시호에게 그런 메시지는 하지 말아 주세요.’
친구 몰래는 무슨, 히로와 나는 시호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어떻게 무사히 잘 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안부를 묻고, 우리가 당신의 친절 덕에 얼마나 편안한 생활을 하는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여전히 호주 문화의 적응이 필요한 점, 호주보다 보수적인 한국과 일본 사람이라는 점을 조금만 고려해 주었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낯선 부분이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유쾌함과 즐거움, 사려 깊은 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제발 불쾌하게만 들리지 않길, 시호에게 더 이상 그런 메시지를 하지 않길 바랐다.
곧이어 그는 자신이 간과한 문화적 차이에 대한 사과와 오해였다는 사실에 관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최악은 뒤집어엎는 거까지였지만, 다행히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이제 더 이상 고민은 사치였다. 무슨 베리가 되었든 간에,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이제 블루베리는 포기하자." 히로도 마음을 다잡은 듯했다.
“그게 좋겠지?”
“나는 여기 떠나 일할 수만 있다면 다 좋아. 그냥.” 시호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파울리는 여전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집세까지 올렸다. 무서운 사람…
그러나,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재미있는 일들이 가득했다. 그건 파울리네 집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데본포트라는 곳에 와 보았고, 집 안과 밖에서 좋은 추억들을 많이 쌓았다.
이 정도면 됐다. 확실히 나갈 이유가 충분해졌고 라즈베리 농장과도 이야기를 끝마쳤다. 캐리어를 싸는 건 일도 아니었다.
- 파울리 덕에 만든 컵케이크 맛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