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태도에 대하여
라즈베리 픽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은 바로 ‘가시 빼기’다. 바늘과 족집게를 가져와 손가락에 박힌 가시들을 하나씩 하나씩 빼낸다. 얼마나 따가운지. 다음 날이면 손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루는 가시 빼는 게 귀찮아, 미루고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근황 이야기를 했다. 새로운 작물을 따게 되었다고, 라즈베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널브러진 휴지 조각들과 족집게를 바라보았다. 이 짓을 매일 해야 한다니.
“블루베리는 가시 같은 게 없어서 좋았는데, 라즈베리는 가시가 많아서 힘들어. ”
“가시는 박힌 거 제때 안 빼고 방치하면 몸 망가진다.”
라즈베리 덕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가시를 오래 방치하면 몸이 매우 피로해진다는 거였다. 몸에 가시가 박히면, 독소나 염증 물질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면, 그걸 간에서 해독하는데, 빼지 않은 상태를 지속한다면 간이 해독하는 데 점점 부담이 증가하고 따라서 몸에 피로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거다.
조용히 족집게를 집어 들었다. 그날 이후로 조회의 시작과 함께, 가방에서 데일 밴드를 꺼내 손가락에 감기 시작한다. 유독 가시가 잘 박히는 부위가 있었다.거기에 밴드를 붙여두면 훨씬 나았다. 라즈베리는 픽킹할 때 어느 베리들보다도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장갑을 낄 수 없었다. 끼더라도 손가락 없는, 반장갑 같은 건 가능했다. 직접 손으로 열매를 잡아야 상태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제대로 품질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손끝으로 알알이 직접 느껴야 했다. 준비했던 장갑들은 전부 쓸모가 없어졌다.
- 갈수록 철두철미해져 가는 밴드 붙이기
- 무시무시한 리스트
어김없이 온갖 경고를 받으며 라즈베리를 따고 있을 때였다. 하루가 끝나면, 리스트가 올라왔는데 색깔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가장 좋은 건 진한 초록색, 그 밑으로 초록색이 점점 연해진다. 연두색,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빨간색! 이 빨간색이 제일 문제다. 빨간색이 지속되면 가차 없이 잘린다.
하지만 나는 아직 라즈베리 3일 차. 설마 자르겠어 싶지만 서도, 여긴 진짜 자를 거 같다. 한 시간에 몇 명씩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중간중간 로우에서 큰 소리로 슈퍼바이저가 소리친다.
“지금까지 10명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 정말, 시호가 아직 여행에서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백수 상태로 맞이하게 생겼다. 머릿속에는 선홍빛의 라즈베리만이 둥둥 떠다녔다. 빨리 따야 하는데… 블루베리 농장에 있을 때가 그리워졌다. 거긴 연습이라도 할 수 있었지. 여긴 처음부터 실전이었다.
슈퍼바이저가 로우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이면 내가 받은 로우가 진흙으로 뒤덮여 있어, 트롤리를 끄는 게 잘 되지 않는 구간이었다. 그래서 이미 저 멀리 트롤리는 내팽개쳐진 상태였다. 퍼넷을 한 아름 안아 들고 조심히 발판에서 내려오는 데 어느새 슈퍼바이저가 바로 앞에 서있었다.
“잠시 얘기 괜찮으세요?”
‘아, 내 차례다. 히로야 나 먼저 집에 갈게.’ 오늘부로 라즈베리 픽킹은 끝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히로라는 분이랑 친구예요?”
‘설마 히로 집에 간 걸까.’
“네.”
“그 친구, 안 될 거 같아요. 여기서 일하는 거. 일단 집으로 보냈어요. 아셔야 할 거 같아서.”
“네?!”
히로가 먼저 집에 갔다고? 어떻게 갔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리스트를 보면, 그래도 히로가 나보다는 위였다. 그렇다고 해도, 둘 다 빨간색이지만… 그렇다면, 히로는 아마 가지를 부러뜨린 거겠지. 하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그 친구는 태도가 문제예요.”
“태도요?”
“네. 일하는 태도요.”
“혹시 어떤 점이…”
태도라니. 어깨너비로 발을 벌리고서 뒷짐을 진 슈퍼바이저를 슬쩍 바라보다가,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원하는 태도. 여긴 군대다. 히로는 아마 중대장 정도 되는 슈퍼바이저의 뜻을 거스른 듯했다. 우스운 비유지만, 맞을 거다. 그가 말하는 태도란, ‘싹싹하지 않다.’라는 것이었다. 말이나 표정, 행동이 간절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히로씨도 그쪽 정도만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나는 얼마나 굽신거린 거지.’였고 두 번째는, 상심했을 히로에게 집으로 돌아가, ‘싹싹한 태도’를 어떻게 설명해서 가르치냐는 거였다. 마지막으로는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정도였다.
나는 어떻게 했더라. 잘리지만 않았으면 했다. 그런 마음으로 ‘네네’거리긴 했다. 비위를 맞춘다거나 아부를 떨었던가. 그건 아니다.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러면, 히로는 ‘네네’ 조차하지 않았다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히로는 그 정도 한국어는 할 줄 안다.
- 혼자 먹는 점심
나는 히로에게 위계, 서열, 눈치, 비위 같은 너무나 한국적인 단어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아, 이해는 쉽게 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이걸 영어로는 어떻게 하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힘이 빠지게 한다.
슈퍼바이저는 라즈베리를 어떻게 하면 잘 딸 수 있는지 알려주다 돌아갔다. 마음이 무거웠다. 히로는 안 봐도 뻔했다.
“괜찮아?”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히로를 찾았다.
“나 어떡하지? 나 이제 일 못해. 가지를 세 개나 부러뜨렸어.”
“슈퍼바이저랑은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딱히. 그 사람은 나한테 아무 말 안 해.”
이상하다. 히로는 그와 대화도 몇 번 나눠본 적 없었고, 오로지 가지 부러뜨린 거 때문에 근심이 컸다. 괜찮다고 아직 잘리진 않을거라 다독이고는 생각했다. 일단, 내일은 도착하자마자 90도로 인사 먼저 드리고 일을 시작하라고 해야 할까? 그치만, 동티모르 픽커들도 그런 식으로 하던가? 그날 저녁 한국 사회와 문화에 관해 설명하고, 상사에게 어떻게하면 조금이라도 예쁨을 받을 수 있는지. 정말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말했다. 뉘앙스를 설명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비위라는 게 있다고, 그래서 눈치라는 걸 봐야 한다고. 여태껏 알려 준 문화 중 가장 재미없고 지루한 이야기였다.
“몰랐어. 난 라즈베리만 땄어…”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닌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 웃기고 불쌍해 보이는 히로
- 히로 꿈 해몽
하루 종일 한숨도 못 잔 건지 히로의 얼굴은 거칠어 보였다. 잠깐 자고 일어났는데 악몽을 꿨다며, 걱정만 잔뜩 키운 채로 차에 올라탔다. 내가 어제 무슨 이야기를 했었던가 싶었다. 고작 열매 픽킹가지고.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갓 스무 살에겐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법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파이팅 하자?”
“응 파이팅.”
여태까지 내가 본 한국 사람들은 히로를 좋아했는데. 어눌한 한국어, 이상한 경상도 말투,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곧잘 웃었다. ‘너의 귀여운 경상도 한국어 맛을 보여줘!’라고 하는 나를 보고서 희미한 웃음을 짓는 히로. 그날 히로는 결국 잘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시호가 왔다. 우리는 시호가 오는 날에 맞춰 이사를 했다. 이제 임시 숙소 생활은 끝났다. 짐 정리를 마치고 우리 셋은 소파에 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에 관해 말했다. 시호는 입을 쩍 벌리고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 ‘어떡해. 어떡해.’ 그때 컨트랙터, 리오에게서 연락이 왔다.
“히로, 무슨 일 있었어요?” 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가지를 부러뜨려서…”
“아하… 그랬구나. 조금만 기다려요. 서류 작성도 할 겸, 애기 좀 나누게.”
잘릴지도 모르는 와중에 서류라니. 그래도 써야지. 페이슬립*은 한 장이라도 중요했다. 어서 빨리 이 지옥 같은 픽킹 생활이 끝나길 바랐다. 리오가 도착했다.
*페이 슬립 : 급여를 받을 때 함께 받아야 하는 법적 문서. 세컨드 비자를 신청할 때, 제출해야 한다.
“히로 괜찮아?” 그는 의자를 끌어와 히로의 옆에 앉았다.
“.. 네..”
나는 히로와 함께 그동안 히로에게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 했다. 태도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는 거, 아무래도 히로는 슈퍼바이저한테 미운털이 박힌 듯한 거. 어젯밤 긴 이야기를 끝으로 히로는 몇 번이고 슈퍼바이저에게 말을 걸 기회를 찾았는데, 슈퍼바이저는 단 한 번도 히로의 로우에 가지 않았다. 히로는 오늘 하루 종일 슈퍼바이저로부터 어떤 검사도 받지 못했다. 아무래도 비위 맞추기는 물 건너간 거 같았다. 진지하게 듣던 리오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안 그래도, 히로한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었어.”
“절대 잘릴 걱정 없고, 돈도 보장되는 일”
리오가 제안한 일은, 자기 친구를 리더로 해서, 농장의 기반을 다지는 일을 할 팀을 만들 계획이었다. 농장에서 필요한 일을 받아서 하는데, 다양한 일을 하는 거였다. 픽킹할 필요도 없고 성적에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물론 잘릴 걱정도 없는 일이었다.
히로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일을 더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었지만, 정해진 시간에다 시급을 보장해 주는 일이었으니 히로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그 정도 버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히로는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나를 잠시 보고는,
“얘도 다른 곳에 갈 수 없어요?”하는 거다. 히로는 라즈베리에 남아 있는 내가 불편한 듯했다.
“흠. 그러면 시호랑 같이 딸기에서 일해 볼래요?” 리오가 시호와 나를 향해 제안했다.
“딸기 슈퍼바이저는 나야.”
시호는 제발 가고 싶다고 빌었다. 그녀는 아직 만나지도 않은, 라즈베리 슈퍼바이저가 벌써 두려웠다.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딸기도, 딸기 나름대로 힘들겠지만, 적어도 가시는 없었다. 해병대 출신 리오는, ‘난 군대 같은 분위기 딱 싫거든!’하고서 표정을 잠시 구겼고, 반신반의하면서도 라즈베리보단 낫겠지 싶어, 가겠다고 했다. 잘된 일일까?
그날 밤, 라즈베리 성적 리스트가 올라왔다. 내내 빨간색에 머물던 나와 히로. 히로는 연노란색에 올라가 있었다. 마지막 날을 불태웠구나! 히로… 나는 여전히 빨간색이었다. 딸기에 가기 전까지 계속 출근은 해야 했다. 내일은 혼자 라즈베리에 출근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