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아 네월아
라즈베리도 오늘로서 마지막이다. 점심시간, 홀로 나와 바닥에 앉아 퍽퍽한 빵을 씹었다. 퍼스트 비자가 끝나기까지 3개월 하고도 조금 남아있었다. 알 만한 베리는 전부 따야만 끝날까 싶었다. 그러다, 불현듯 이게 마지막 작물이 아니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아니. 딸기가 진짜 마지막이다. 제발.
그러고 보니, 라즈베리 농장에는 슈퍼바이저와 나를 제외하고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부 떠난 건지, 내쫓아진 건지, 애초부터 아무도 오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농장을 걸어 나오며, 여기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단 생각이 들었다. 아직 가시 박힌 손이 덜 아팠나 보다.
그래도 더 잘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드디어 시호와 함께 하는 첫 출근. 샛노란 형광색의 워커복에 장화를 신은 시호는 정말 귀여웠다. ‘머리는 땋는 게 좋더라.’하고는 앉혀두고 한쪽씩 땋았다. 새벽 5시. 12월 타즈매니아는 너무 춥다. 후드티를 껴입고 차가 오기만 기다렸다.
- 시호의 첫 출근
딸기 농장도 라즈베리 농장만큼이나 규모가 컸다. 다른 게 있다면, 늘 왼쪽 구역으로 출근했는데, 오른쪽 구역으로 출근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한국인 워커들이 꽤 있다는 것, 그리고 히로 없이 시호와 둘이 출근한다는 거였다.
“좋은 아침이야!”
“오늘도 파이팅하자!”
딸기 슈퍼바이저, 우리의 컨트랙터 리오는 활기차게 워커들을 맞이했다.
라즈베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조회였다. 마치 친구처럼 리오에게 장난치는 워커들을 보고, 리더의 자리가 새삼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 리오는 친구 같았다. 그는 주변 사람을 열심히 챙겼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집으로 돌아가는, 다툼이 일상이던 라즈베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시호는 그런 리오가 딸기 농장을 다스리는 신 같다는 귀엽고도 엄청난 칭찬을 했다. 그는 내게도, 라즈베리 지옥에서 구제해 준 신이긴 했다.
- 화기애애한 조회
딸기 픽킹도 마찬가지로 트롤리를 끌고 해야 했다. 퍼넷에 포장하는 일도 물론 같았다. 하지만 딸기는 그 어떤 베리보다도 따는 속도가 빨라야 했다. 블루베리나 라즈베리처럼 크기가 작은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양을 딸 수 없다. 그래서 손이 배로 빨라야 했다. 딸기 픽킹은 비교적 쉬웠다. 잎을 헤칠 때 가끔 재채기가 난다는 것 빼면 완벽했다.
하지만 이곳도 이곳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로는 인스펙터가 매우 세심하고 꼼꼼하다는 거다. 인스펙터는 이미 완성된 퍼넷 속 딸기를 하나씩 들어가며 체크를 했다. 약간의 흠, 물러짐만 보여도 바로 전체 검사에 들어갔다. 퍼넷이 조금이라도 비어 보인다고 판단이 서면, 다른 트레이는 확인하지 않고 더 채워 오라며 돌려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로는 딸기는 어떤 베리보다도 무겁다는 거다. 여러 트레이을 쌓아놓고 제출하러 가면, 트레이를 하나씩 내려주며 열매를 확인 받아야 했고, 스무 트레이가 넘는 때에는 무거워서 어깨와 손목이 찌릿찌릿거렸다. 그러니까 양심껏, 재주껏 조절해가며 잘 통과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딸기 농장에서는 매일 아침 3번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거다. 조회가 끝나면, 좋은 트롤리를 갖기 위해 뛰어야 했고 트롤리를 갖고 나면, 트레이 트럭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여기서도 트레이 트럭이 어디 설지 대충 예상한 뒤, 구역마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 트레이를 인스펙터들이 내려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해, 높은 트럭에 다들 올라타 한 아름씩 가지고 간다. 몇몇 워커들은 한꺼번에 4~50개의 트레이를 가져간다. 그러는 바람에 남은 워커들이 3~4개밖에 가져가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데, 그러면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여기는 자유로워도, 너무 자유로운게 문제였다.
트레이 전쟁이 얼마나 심각하냐면, 자리를 비운 새 훔쳐 가기도 한다. 많이 구하지 못한 워커는 돌아다니며 제발 하나만 달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트레이가 없어 일을 못해, 로우에 가만히 앉아있는 워커들도 있었다. 그러면 그만큼 트레이를 준비하면 되지 않은가 싶지만, 트레이는 엄청난 크기의 트럭에 빈틈 하나 없는 상태로 가득 채워져 온다. 그리고 곧장 다음 트레이를 가지러 간다. 모두가 양심적으로 가져가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 문제였다. 신 같은 리오는 누구에게나 공평했지만, 공평을 위한 개입은 하지 않았다. 이 전쟁이 가장 골치였다.
이뿐만 아니었다. 로우 전쟁도 있었다. 딸기 비닐하우스는 세 개의 로우를 감싸고 있는데 첫 로우와 마지막 로우는 비닐하우스의 가쪽이라 트롤리를 끌며 들어가고 나갈 때 꽤 힘이 드는 로우였다. 비닐하우스를 지탱하는 봉이 계속해서 트롤리 바퀴에 걸렸고 비가 온 날에는 진흙탕이 돼 버리는 바람에 움직이기 어려웠다. 모두가 중간 로우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 트롤리 전쟁 (육안으로 좋은 트롤리인지 알 수 있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스무 트레이를 넘기면 트롤리를 끌 때 온몸의 근육들이 번쩍번쩍 살아 있음을 느낀다 …
수많은 워커들을 두고 번갈아 로우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었다. 라즈베리였더라면, 어떤 방법을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딸기에서는 불가능했다. 트롤리를 확보하면, 뛰어가 트레이도 챙겨야 했고 로우의 상황을 봐 가면서 걸음을 조절하는 거다. 중간 로우 배정을 받으려 꼼수 아닌 꼼수를 쓴다. 도착하는 대로 로우 배정을 받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들어갔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어느 타이밍에 가면 중간 로우를 받을 수 있는지 따져가며 걸어간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전쟁들만 무성했다.
일찌감치 낄 수 없다고 판단했던 나와 시호는 바퀴가 덜커덩거리는 트롤리를 잡고 트레이 몇 개를 주어 빈 로우에 들어갔다. 가르쳐준 방법대로 따고 나와보니, 함께 들어갔던 워커들은 온데간데없고, 저 멀리 시호만 보였다. 게다가 시호는 아직도 한창인 듯했다.
“시호! 딸기가 너무 많아?” 로우 끝에 선 내가 물었다.
“응? 어! 너무 많아!” 트롤리를 끌고 가던 시호가 고개를 돌려 해맑게 웃었다.
“근데 완성한 트레이가 몇 개 없는데?!”
썩은 딸기라도 있는 건지, 로우에 들어간 시간 치고는 오래 있는 시호가 (물론 나도 늦게 나왔지만…) 궁금해 안으로 들어갔다.
“너… 뭐 해?” 놀란 내가 물었다.
시호는 딸기를 하나씩 하나씩 따서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퍼넷 안에 넣었다. 시간이 아주 철철 넘치는 듯했다.
“왜?” 그러고는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냐며 예쁜 딸기를 들고서 내게 보여주었다.
“너… 너 시간이 얼마나 없는데 이렇게 따고 있었어?” 놀란 내가 앞으로 가 시호 로우의 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이러면 도대체 언제 끝내려고. 얘는 딸기 따는 방법을 안 배웠나? 이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거였어? 그런 의문들 사이로, 또 웃기기는 엄청 웃겼다. 딸기를 요리조리 둘러보며, ‘음 넌 오늘 가도 돼.’, ‘어? 너는 안 되겠다. 아직 초록색이 있어.’ 궁시렁 궁시렁.
“장난해?”
“왜?!”
“그만해. 그런 말 하면서 따는 곳 아니야.” 웃음을 겨우 참고 목소리를 깐 채 말했다.
“아니 근데 너무 조용해서 혼잣말이라도..”
“시간 없다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빵 터졌다. 저 멀리 리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 빨리빨리 따야 돼!
“둘이.. 같은 로우에서 뭐 하고 있어요?”
시호가 딸기를 어떻게 따고 있었는지 아냐며 흉내 내 보이는 나를 보고선 리오도 시호도 얼굴이 벌게진 채 웃었다. 시호도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시호, 그럴 시간이 없어. 그러면 진짜 잘려. 빨리빨리 해야 돼. 빨리빨리.”
“넵 알겠습니다!” 대답만 우렁찼다.
점심시간, 싸 온 도시락을 먹으며 시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왜인지 게임하는 기분이라 재미있다는 시호의 말을 듣다, 문득 픽킹을 처음 한 날이 생각이 났다. 재미있었지. 불안하고 걱정되는 것도 있었는데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라 참 재미있었다. 시호가 빨개진 볼을 하고서 싸 온 음식이 맛있다며 웃어 보였다. 열심히 일하고 먹는 밥도 정말 맛있지. 맛이 있었지.
- 시호표 도시락 모음
숙소에 도착하니, 새 워커가 와 있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하우스 메이트였다. 새로운 일을 마치고 돌아온 히로와 농장 일이 처음인 시호, 딸기 농장 첫 출근인 나, 그리고 처음 온 하우스 메이트 우리 넷은 저녁을 함께했다. 이렇게나 왁자지껄한 건 오랜만이었다. 앞으로 두 자리. 새로운 사람들이 채워지면 더 좋은, 더 재미있는 추억들이 가득 생기겠지 싶었다.
평화롭고 배부른 하루였다. 받은 딸기 성적표 빨간 라인에 있으면서도 딸기 농장은 문제없다 싶었다. 그렇게 3일 뒤 리오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