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식이면 잘려.”
이런 말이야, 한두 번 들었겠냐마는, 딸기 농장은 겪었던 어느 농장들보다도 셌다. 그래도, 집으로 보내버리는 라즈베리보다야 낫지 않나 싶으면서도 뙤약볕 아래 서서 인스펙터의 날카로운 말을 들으며, 무거운 트레이를 덤벨 들듯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도 그거 대로 괴로운 맛이었다. 나와 시호는 유독 심했다. 새로 온 워커인 데다, 처음 겪는 작물이니 말이다. 리오는 우리 로우를 수시로 번갈아 가며 들락날락했다.
“빨리 빨리 해야 돼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어느 컨트렉터가 이렇게나 지극정성일까. 그는 우리를 격려하고 들여다 봐 주고 로우에서 나올 때 트롤리를 힘껏 당겨주며 조금이라도 편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또 배려했다. 그뿐 아니었다. 인스펙터로부터 걸리지 않도록 자신이 먼저 체크해주고 실수를 몇 번 숨겨 주기도 했다. 그런 리오를 보고 있자면, 더 잘하고 싶은 마음만 남았다. 하루빨리 제 몫을 할 수 있길 바랐다. 미안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졌다.
- 딸기를 따 다 보면 말도 안 되게 이상한 모양의 딸기를 보게 된다. ( 이건 정말 귀여운 수준 )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왔는데, 왠지 시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리오가 새로운 그룹 톡 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와 시호를 포함해, 몇 워커들이 초대되어 있었다. 리오는 농장 매니저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번 주 중으로 이 워커들을 전부 정리해줬으면 한다는 연락. 그 워커들이 바로 우리다. 이번 주라니.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잘린다고?
그럴 수 있다. 농장에서는 예삿일이다.
“정말로 마지막 기회예요. 있는 힘껏 열심히 해 주셔야 해요.”
리오는 농장 매니저에게 사정했다.
‘그들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며칠만 기회를 더 준다면 충분히 성장할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는 들어온 지 3일 만에, 찬스까지 써 버렸다. 그룹 톡 방의 연락을 끝으로 리오에게서 전화가 왔다.
- ‘그들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좋아지고 있어. 항상 더 잘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보세요…?”
“기운이 쏙 빠졌구먼… 톡 읽었죠?”
“네..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이제 죄송하다는 말 금지야.”
“그래도.. 많이 도와주셨는데..”
“여기가 원래 처음 하는 사람들이 적응하기 어려워요. 딸기를 따던 사람들이 와서 해도, 잘려 가는 판인데 뭐.”
“…”
“근데 정말 열심히 해 봐요. 나도 도울 수 있는 만큼 열심히 도와 줄게. 시호랑 같이 미친 듯이 한 번 따 봐요. 성적표에 빨간색만 아니면 돼. 그냥 초록색 가까이만 있어도 돼요. 무슨 말인지 알죠?”
“네…”
“기운 차리고! 잘할 수 있죠?”
“네..!”
리오는, 정말이지 끝까지 고마운 사람이었다. 초대받은 톡 방 이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워커는 나와 시호였다. 우리는 바닥 중에서도 바닥이었다. 잘려도 가장 먼저 잘릴 게 뻔했다. 정말 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끝났다. 이제 온전히 우리의 문제였다. 손을 갈아엎든, 트롤리를 업고 뛰든 우리가 변해야만 했다. 시호는 벌써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 잘리는 거지?”
“아직은 아니야.”
“어떡하지? 리오한테 너무 미안해.” 시호는 눈물을 훔쳤다.
“미안한 만큼 열심히 하면 돼. 괜찮아.”
“.. 아니 못 할 거 같아서 미안해. ”“장난해? 무조건 해야 돼. 해!” 정말이지 시호의 이런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너무 웃겼다.
- 시호와 나는 딸기가 미웠고 좋았다. 맛있고 예쁘지만 빨리 따는 건 어려운 딸기
웃을 상황은 아니었지만, 시호는 이런 상황에서도, 울면서도 저런 말을 곧잘 한다. 정작 본인은 웃기려 한 게 아니었다며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아무튼 그건 장난이어야 했다. 솔직한 심정이라며 계속해 우겨댔지만, 무시했다. 방법이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는 데 섣불리 단정 짓고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라즈베리보다 훨씬 나은 거야. 라즈베리라면 벌써 집에 갔어.”
옆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앉아있던 히로는 위로인지, 웃기려고 한 말인지 모를 말을 했다. 시호에겐 왜인지 위안이 됐다.
“그래! 고마운 리오를 위해서 난 열심히 할 거야!”
“좋아! 그 마인드로 계속 가는 거야.”
“네거티브 감자지만 그래도 계속해야지!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시호의 방 창가 어느 한쪽에는 작은 감자 인형이 하나 있다. 오래전 친구에게 받은 인형이라고 했는데,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인형이다. 새까만 눈을 가진, 싱긋 웃고 있는 감자인데 배에는 ‘Positive Potato’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자신을 위해 친구가 선물해 주었다고 한다. 시호는 종종 스스로가 지나치게 부정적이라고 생각이 들 때면 자신은 ‘Negative Potato’라고 표현하고는 했다. 이 부정 감자를 긍정 감자로 돌려놓는 방법은 간단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된다. 누군가를 위한다고 생각하면 움직이는 착한 감자였다. 우선 감사한 리오를 위하기로 했으니, 나아질 거라 믿었다.
딸기 농장은 총 여섯 구역으로 나뉜다. 하루는 A, B, C 구역, 다음 날은 D, E, F 구역에서 번갈아 가며 일을 한다. A, B, C 구역이 D, E, F 구역에 비해 딸기의 질이 좋다. 그날은 A, B, C 구역을 픽킹 하는 날이었다. 퍼넷 박스가 오면 필요한 양만큼 들고 가는데, 신기하게도 오늘은 일렬로 줄을 서서 다른 퍼넷을 받는다고 했다. 새롭게 받은 퍼넷은 넓고 얕았다. 이 퍼넷에 딸기를 담을 때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9개의 고품종만을 대각선으로 예쁘게, 가지런히 담을 것. 이름하여, ‘프리미엄 딸기’였다.
프리미엄 딸기는 농장에서 재배한 품종 중에서도 품질이 아주 우수한 것들만 선별한 딸기다.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 혹은 프리미엄 마켓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한다. 원래도 딸기 검사는 엄격했지만, 프리미엄 딸기 검사는 정말 차원이 달랐다. 프리미엄 딸기는 가능한 한 빨리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로우로 갈수록 질이 나빠지기 때문에 가능하면, 첫 로우에서 끝내는 게 가장 좋다. 들쭉날쭉한 크기를 가진 딸기들 사이에서, 퍼넷에 담았을 때 흔들림이 없어야 했으므로 다른 딸기보다는 크면서 먹음직스러운 모양새를 한 9개의 딸기를 찾아야 했다.
- 처음에는 엉망으로 만들어서 혼났다.
하필이면, 오늘은 정말 작정하고 따야 하는 날인데… 이 생뚱맞은 프리미엄 딸기는 웬 말인냐는 말이다. 오는 조용히 나와 시호를 불렀다.
“오늘 프리미엄 딸기까지 하면 정말 내일 잘릴지도 몰라요.” 리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떡하죠…?” 잔뜩 겁먹은 시호가 물었다.
“일단 프리미엄 딸기는 내가 중간중간 만들 테니까, 둘은 들어가서 프리미엄 딸기 트레이 아래에 일반 딸기 트레이를 숨겨 놓고 일하도록 해요.”
각 워커마다 5개의 프리미엄 딸기 트레이를 만들어야 했다. 인스펙터는 수시로 로우에 들어와 프리미엄 딸기를 만들고 있는지 검사를 했다. 딸기 신선도를 위해 만드는 즉시 제출해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프리미엄 딸기 퀘스트를 깨야, 일반 딸기를 딸 수 있었다. 그걸 리오가 몰래 하겠다는 거였다.
인스펙터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우당탕탕 프리미엄 딸기 트레이를 올려두고 열중하는 척을 했다. 그러다 다른 로우들을 돌고 돌아온 한 인스펙터가 ‘너는 왜 프리미엄 딸기가 늘지 않냐’라고 물었다. 식은땀이 줄줄 새어 나왔다. 만약 리오의 도움으로 오늘을 잘 이겨낸 대도 내일 프리미엄 딸기가 없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언제까지 프리미엄 딸기를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자코 리오만 기다릴 수 없었다. 정말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 코피 아니고 딸기
프리미엄 딸기에만 열중했다. 확실히 기준이 센 것을 만들고 나면, 일반 딸기를 따는 건 훨씬 쉬운 일처럼 느껴질 터였다. 겨우 만들어, 통과가 끝나고 나서야 일반 퍼넷을 받아냈다. 꽤나 늦은 듯했다. 어쩔 수 없지만, 리오가 만들어 준 고마운 기회는 이제 물 건너간 거 같았다. 시호도 보이지 않았다. 잘 했어야 할 텐데… 이미 페이 슬립을 몇 장 모아 둔 나와는 달리 시호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잘릴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혼자 남게 될 시호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진짜 큰일이네. 오늘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또 이야기가 나왔어요.”
역시나. 당연히 올 줄 알았다. 리오는 목소리가 한껏 깔려 있었다.
“리오님. 저희 잘릴까요?” 옆에 앉은 시호는 이미 두 손을 모은 채 기도 중이었다.
“일단 내일은 출근해요. 아직 확실하게 자른다는 말 없고 이번 주까지는 시간 있으니까. 아직 이틀 남았잖아.” 리오는 괜찮다며 우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근데 문제는,”
“문제는?”
“모레부터 제가 없어요.”
“네?!”
리오는 시드니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하필 그가 시드니에 있는 기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단 이틀이었다. 가능할까? 시호는 망연자실했다.
“나는 리오의 시호~ 빨리빨리 해야 돼~ 이거 없으면 무리야. 무리” 시호는 두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말했다.
“일단 그건 녹음해서 보내라고 할게.”
진정한 우리 실력이 드러날 테다. 진짜 실력. 진짜 실력으로 겨루는 이틀일 거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편애로, 편법으로, 속임수 따위로 통하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나를 마주해야 했다.
- 간바레 간바로 ! ( 힘내 힘내자 ! )
“시호. 우리 이제 진짜 스스로 힘으로 해야 돼.” 시호의 눈썹이 점점 내려왔다.
“우리 도와주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해야 해.”
“다른 생각들은 없애고 손발만 막 움직여. 리오에게 고마운 만큼, 미안한 만큼. 여기서 살아남고 싶은 만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여긴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픽업을 도와주는 재미있는 한국 사람들, 얼마 전 이사 와 친해진 일본인 친구들, 함께 그룹방에 초대되었던 대만 친구, 매일 열심히인 동티모르 워커들, 멋진 미소를 지닌 스페인 커플, 태국인 인스펙터들. 리오와 함께 우리를 도와주는 언니, 무엇보다 정말 고마운 리오까지. 매일 떠오르는 아침 해와 함께 불태우는 워커들. 그들과 보내는 시간들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값지고 소중히 남을 시간들이었다. 시호도 같은 마음일 거라 믿었다.
“진짜 열심히 해볼게. 나 여기서 세컨드 비자 꼭 만들고 싶어.” 다행이었다.
다음 날, 우린 비장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배정받은 로우 안으로 들어가려는 데 저 멀리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출근길에 보는 광경
“시호!”
커다란 농장에 로우를 뒤지며 나를 찾아온 시호의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돼 있었다.
“나 어떡해. 나 못 하겠어.”
“안 돼, 안 돼. 해야 돼. 별거 아냐. 고작 딸기야 딸기” 나는 티셔츠 소매를 끌어 다가 시호의 얼굴을 벅벅 닦였다.
“잘리면 어떡해? 나 못 해. 아마 못 할 거야.”
“아니야. 해 보고 말해. 빨리 네 로우로 가.” 으아앙 울어버리는 시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은 곧잘 무너졌다 세워 지길 반복한다. 몇 시간 만에도, 하룻밤 사이에도. 안쓰럽고 귀엽고 가엽다가 웃기면서도 금방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간다! “시호!!!!” 리오와 언니가 찾아왔다. 시호는 양팔이 잡힌 채 강제로 끌려갔다. 잘 가. 우리 꼭 살아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