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늘 낯설다.
역시나 시호는 하나와 아야미랑 금세 친해졌다. 일본어를 잘 몰라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시호는 일본어를 쓸 때면, 자기 모습을 더 잘 드러내는 듯했다. 재미있고 다정한 모습을 말이다.
“하나랑 아야미가 같이 라벤더 보러 가재! 어때?” 시호가 들뜬 듯 방긋 웃으며 물었다.
“완전 좋지!”
하나와 아야미는 운전을 잘했다. 그 덕에 우리는 호바트에서 3시간이나 떨어진, 브리스토우 라벤더 농장으로 갔다. 세상이 보랏빛으로 물든 듯했다. 탁 트인 넓은 들판에 빼곡한 라벤더가 꼭 액자 속에 들어온 듯 그림 같았다.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사 나눠 먹고, 사진도 여럿 찍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하나와 아야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시호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었다.
- Bridestowe Lavender Estate
“고마워. 좋은 친구들 만들어 줘서.” 시호가 말했다.
“내가 뭘. 네가 좋은 친구 만드는 걸 잘하는 거지.”
시호는 정말 좋은 사람을 곁에 두는 걸 잘했다. 내가 모르는 시호의 친구들도 분명 좋은 사람일 게 분명했다. 방으로 돌아가 쉬던 시호는 언젠가 데본포트에서 있었던 때처럼 나와 히로를 제 방으로 불렀다.
“빨리 와 빨리!”
시호의 방 창문 밖 풍경은 너무 예뻐서 거짓말 같았다. 바깥 구경만 하루 종일 할 수 있겠다며 방방 뛰는 시호의. 말이 충분히 이해됐다.
- 날 마다 색이 다른 시호의 방 바깥 풍경
새해가 되었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떡국을 만들었다. 히로가 무척 좋아했다. 히로는 이제, ‘새로운 년에 먹는 거’, ‘비가 올 때 먹는 거,’, ‘스트레스받을 때 먹는 거’라고 자기가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을 자기 언어로 곧잘 말했다. 순서대로 떡국, 김치전, 매운 음식이다. 시호와 히로랑 지내면서 정말 많은 요리를 했다. 음식은 사실, 히로가 잘하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시간이 늦어 나와 시호가 번갈아 가며 요리했다. 가끔 히로가 쉬는 날이면 히로가 해주는 음식을 먹었다. 뭔가를 같이 만들어 먹는다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 줄 몰랐다. 평소 요리는즐겨하지 않던 내가, 요리를 새로운 취미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얼마 뒤, 히로의 생일이었다. 히로는 체리 농장에 일하고 있어서 가끔 체리를 왕창 들고 오곤 했는데, 시호와 나도 질세라 딸기를 따서 아이스 백에 숨기고는 집으로 가져와 체리와 함께 먹었다. 딸기는 남으면 딸기잼이나 딸기 우유로도 만들어 먹었다. 며칠 동안 모은 체리는 히로의 생일 케이크로 쓸 수 있었다. 농장에서 일하면서 얻은 가장 큰 재미였다.
- Happy Birthday !
어느 작물이든, 시즌의 끝이 오기 마련이다. 딸기 시즌이 곧 마무리되는 듯했다. 전에는 따야 하는 딸기가 많아서 허둥지둥했더라면, 이제는 딸 만한 딸기를 찾느라 바빴다. 아직 페이슬립이 모자란 시호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나 다른 곳에 가야겠지…?” 시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리는 몇몇 다른 친구들과 워커들에게 페이슬립을 모을 수 있는 다른 농장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 다녔다. 시호와 같이 이동할 수 있을지도 모를, 앞집 셰어하우스 친구나 하나와 아야미가 있어서 걱정을 조금 덜었지만, 시호가 가끔 불안한 내색을 비치면, 마음이 쓰였다. 부디 별 탈 없길. 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일하다가, 다른 곳에 가더라도 잘 지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오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 잘렸대. 어떡해…?” 시호가 잘리고 말았다.
시호의 딸기 픽킹 실력은 꾸준하게 늘었다. 잘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여느 농장이 그렇듯 상황이 좋지 않으면 워커 인원수를 줄여야만 했다. 아무래도 리스트에 초록색을 뺀 나머지 색상에 있는 워커들을 전부 자른 듯했다. 이번 주까지가 마지막인 나는, 한 주간 혼자 출근하게 됐다. 시호는 당황스럽고 속상했다. 눈물을 살짝 글썽이더니,
“아니야. 어쩔 수 없어. 이제 난 자유고, 다른 곳을 찾으면 돼!”하는 거다.
“좋아! 나도 같이 찾아 줄게! 오랜만에 푹 쉬고 있어!”
눈을 반짝인 채, 동그란 안경을 다시 올려 쓰는 시호가 대견하고 기특해 내가 다 기뻤다. 농담으로 ‘한 번 잘려봐서 두 번째는 별거 아니다 그치?’ 했더니 깔깔 웃으며, ‘어, 진짜 생각보다 괜찮아. 나를 잘랐다는 게 화는 나지만…’하고는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몇몇 사라진 친구들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이미 페이슬립을 전부 모은 나는, 앞으로 있을 가족들과의 여행을 위해 한 주 더 남아 돈을 모으기로 했다.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남아있는 날들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타즈매니아를 떠나기까지 하루가 남았다. 시호에게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물었다. 시호가 좋아하는 건, 김밥이랑 당근 케이크 그리고 바나나킥.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히로와 시호, 그리고 나.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도 벌써 4개월이나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이겨냈고 재미있게 보냈다.
히로와 나는 그동안 지겹도록 입었던 워커복을 버리러 갔다. 사진 한 장은 찍자며 히로가 불러 세워, 멋스럽지는 않지만, 추억이 가득한 옷가지를 찍었다. 크기가 커 조금 덜그덕거리던 장화도 버렸다. 덕분에 여전히 엄지발가락에는 농장에서 일할 때 만들어진 굳은살이 작게 남아있다
- 탈출이다 !
히로와 시호 그리고 내 모습을 본뜬 쿠키도 굽고 시호가 좋아하는 당근 케이크를 만들어 장식했다. 김밥을 싸고 남은 시간에는 편지를 썼다. 시호가 앞으로 계속해서 용기를 내며 살길 바랐다. 시호는 잘하는 것도 많았고 좋은 것도 잔뜩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잘 모르는 시호는 스스로를 자주 낮췄다. 그런 시호가 가끔 이해되지 않았다. 사랑이 많은 시호가 앞으로도 주변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지내길 바랐다.
같이 저녁을 먹고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보기 어렵겠지. 시호는 자주 우스갯소리로 하루빨리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 살 거라고 했었는데… 시호를 보려면 다시 호주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 바이바이 시호
컨트랙터와 잘 챙겨주었던 친구들, 그리고 워커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제 정말 농장 일과는 끝이다. 두 번 다시는 없겠지. 호주에서만큼은 말이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 아침 멜버른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테지만, 여행을 마치고 호주로 다시 돌아와 다른 일을 한다는 내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기대가 됐다. 이제 다시 1년이 생겼다. 어떤 날을 보낼까. 어떤 일을 해도 재미있을 거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어떤 시간을 보내지? 내가 만들어 낸 1년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잘 쓰고 싶었다.
언젠가 또 타즈매니아에 갈 일이 생길까. 아마 가까운 미래는 아닐 것만 같다. 커다랗고도 귀여운 섬, 아기자기한 건물들과 친절한 사람들. 그립지 않을 게 하나도 없을 거 같았다. 고작 4개월이었는데, 전부를 기록할 수 없는 추억이 너무 많았다.
아쉬워서 더 행복한 기억을 안고, 또다시 새로운 여정에 올랐다.
- 정든 셰어하우스도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