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에 살아요 !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말레이시아. 호주에 도착하면, 비자가 바로 나올 거란 장담은 없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집은 찾아야 했다. 앞으로 퍼스에서 살 집 말이다. 비싼 숙박 시설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물론 여러 조건을 잘 따져가며 구한다는 전제하에.
타즈매니아 데본포트에서 시호와 히로,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함께 살았을 때 지내던 집이 좋았다. 파울리가 시호에게 이상한 메시지만 보내지 않았더라면 더없이 좋았을 그 집. 홈스테이 같으면서도 셰어하우스 같기도 하며 식사나 일상생활과는 분리되어 있던 곳. 게다가 영어까지 늘 수 있는 환경! 이런 점에서는 완벽했다. 공용 공간을 제외하고 내 방에서는 아늑하게 생활하면서도 가끔은 거실이나 주방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서로 간에 지나침이 없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좋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집으로 찾기 시작했다. SNS와 여러 사이트에 숙소를 구한다는 글을 쓰고, 하루 수십 번 셰어하우스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몇몇 집주인이 연락이 왔고 스팸도 판을 치고 있었다. 히로는 어쩐지 나를 스팸에 잘 걸리는 사람으로 판명한 듯, 꼭 재차 확인을 요구했다.
“너는 사기를 잘 당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내가 확인할게.”
그런 타입도 있냐며 흘겨보고서 보고 있던 폰을 건네주었다. 히로 덕인지 몰라도 괜찮은 숙소 후보들이 생겼다.
여행 비자가 있어, 퍼스에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는 몇몇 집주인과 연락하며 추린 후보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소통하고 집 컨디션이 좋았던 곳의 인스펙션을 보러 가기로 했다. 공항에서 짐을 찾고 서둘러 빠져나왔다.
하늘색 지붕의 커다란 집. 시티와 거리가 꽤 있지만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울굴가 살 적이 생각나기도 하고 하필이면, 날씨가 좋아서 일진 몰라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고 그림자 아래로 걷는 사람들과 여러 강아지들이 온화한 분위기의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곳곳에 피어 있는 꽃, 개성을 한껏 살린 여러 집의 마당, 울창하고 커다란 나무들이 거리를 꾸미는 듯했다. 마치 공들여 조립한 레고 하우스들이 모인 동네 같았다.
- 집 앞에는 이렇게나 드넓은 호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시티와 거리가 꽤 있다는 점에서 망설여졌다. 집을 소개해 주겠다고 손짓하는 집주인, 티아나를 따라갔다.
“앞으로 지내게 될 방은 여기야.”
바깥에서 본 것과 같이 내부도 굉장히 컸다. 파울리네 집도 작지 않았는데 두 배는 족히 돼 보였다. 발코니에다가 작은 정원까지 갖추고 있는 이 집은 확실히 티아나가 보내준 사진 속 집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안내해 준 방 안에는 작은 냉장고가 있어서 식재료는 개인적으로 따로 넣어둘 수 있었다. 게다가 방에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포함되어 있어, 사생활 분리가 철저했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이런 면들에서는 확실히 분리된 듯 보였지만, 정작 방은 달랐다. 방이 아닌 공간을 방으로 만든 건지 앞으로 내가 지내게 될 방은 문이 따로 없이, 아코디언도어로 돼 있었다. 당연히 방이 아니었으니, 서랍장이나 수납장이 따로 없었다. 그것만 빼면 완벽했다.
티아나는 수다스럽지만, 굉장히 친절했다. 말레이시아 사람이었는데 가족들과 이민을 와서 두 딸과 막내 아들, 이렇게 넷이서 지낸다고 했다. 그녀는 히로와 내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우리 또한 좋은 환경인 데다 각자의 공간까지 마련돼 있어서 이런 곳을 뛰어넘는 집이 없을 거 같았다.
“어떤 거 같아?” 티아나는 솔직하게 답변해달라며 물었다.
“음… 좋긴 한데, 우리가 차가 없어. 일을 구해야 하는데, 일은 시티에서 구하기 쉬울 테고, 여기는 시티랑 거리가 있으니까 조금 고민되네. ”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신에게 방법이 있다며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곧장 자신의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 나와 히로는 조용히 한국말로 속닥였다.
“너 여기 어때? 좋아?”
“어 좋아 보이는데? 여기보다 괜찮은 곳 있었어?”
“솔직히 없긴 해. 근데 우리 일은 어떻게 구해?”
“그게 진짜 문제긴 하다.”
티아나는 우리의 사정을 잘 알겠다며, 자신의 딸이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갑자기?
퍼스에 도착한 지 반나절도 안 돼, 집도 구하고 일도 구한다는 말인가? 이런 행운이 갑자기 뿅 나타난다고?
“딸이 어디에서 일하는데…?”
이렇게 술술 풀려버리면 좀 의심해야 한다. 여러 번 겪은 사기 덕분에 깨달았다. 히로도 조심스럽게 나를 툭툭 쳤고, 나도 안다는 눈짓을 보냈다. 내가 도대체 얼마나 미덥지 않으면…
“내 딸은 아이스크림 가게 매니저야. 너희 Yochi 알아?”
요치? 잠시만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요치는 멜버른에서 자주 가던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사실 가격이 비싸 자주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호주에서 정말 유명한 아이스크림 브랜드였다. 완전히 믿는 건 아닌데, 반은 넘어갔다.
- Yo-chi
“일 찾는 게 걱정이라면, 딸이 도와 줄 거야.”티아나는 확신이 넘쳤다.
“오늘은 딸이 저녁에 들어와. 퇴근해서 들어오면 자세히 말해 볼게.” 게다가, 추진력도 장난 아니었다.
히로와 나는 솔직히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오늘 밤 고민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나왔다.
“빨리 연락 줘!” 솔직한 그녀는 들어오기로 마음먹는 대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시티로 가는 내내 히로와 나는 행복한 기분을 억눌렀다. 침착하자 침착해.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저녁을 먹고 있을 때쯤 티아나에게 연락이 왔다.
“딸이 그러는데, 너희가 일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해. 너희 생각은 어때? 아직도 고민 중이야?” 그녀의 잦은 연락은 마음을 조급히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더 고민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 곳도 일할 곳도 주어지는 저 집이 우리에게 딱 맞는, 가장 좋은 조건의 집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집세도 그렇게나 비싼 편은 아니었다.
“좋아, 갈게!” 티아나는 바로 답장이 왔다. “지금 데리러 갈게.”
숙소에서는 이틀이나 더 머물 수 있었는데, 당장 데리러 오겠다는 티아나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히로와 내 짐은 정말 많고 무거웠다. 시티에서 티아나의 집까지 차 없이 이동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알아서 척척 진행되는 듯했다.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 티아나의 만다린 열매
도착한 티아나의 집에는 쉬고 있는 두 딸과 아들이 있었다.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짐을 풀었다.
“헤이즐~ 히로~”
짐을 푸는데, 티아나가 계속해서 불렀다. 황급히 나가보니 방문(애매한 문이지만) 앞에 서 있는 티아나는 당장 노트북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력서를 지금 내 딸에게 보여줘.” 티아나는 정말, 뭐랄까. 한다면 하는 사람 같았다.
가방에서 노트북만 꺼내 거실로 나갔다. 쉬는 게 대수랴.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히로와 나는 두 딸에게 이력서 첨삭을 받았다.
“꼭 큰 시티가 아니더라도 여기 주변에 여러 동네가 많아.” 티아나는 퍼스의 크고 작은 동네를 소개해주었고 그 덕에 마음을 더 내려놓게 되었다.
이 밖에도 티아나는,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들에, 항상 ‘Listen, Listen’ 하고는 합리적이고도 좋은 방안과 대책을 제시해 주었다.
- 집 앞 마트에 파는 귀여운 감자
티아나의 첫째 딸, 세레나는 내가 평소 호주에서 즐겨 먹는 아이스크림 가게, 요치 전체 책임자였다. 그것도
퍼스에서 매출 상위권에 있는 곳의 매니저. 우리는 이력서를 꼼꼼하게 수정받은 뒤, 세레나에게 메일을 보냈다. 얼떨결에 일어난 일들이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요치에서 일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 같았다.
“매일 아이스크림 먹을 수 있어.” 티아나의 둘째 딸, 애슐린이 웃으며 말했다.
“와, 그거 진짜 좋다. 너희 맨날 먹어?”
막내아들이 냉장고 아래칸을 열어 보여줬다. 엄청나게 쌓여 있는 아이스크림 통. 매일 10달러 넘지 않는 선에서 아이스크림이든, 토핑이든 요치에 있는 뭐든 들고 올 수 있다고 했다.
호주 프로즌 요거트 전문점, Yochi는 셀프서비스 방식의 가게이다. 아이스크림 컵을 들고 고객이 직접 맛을 골라 담고, 위에 과일이나 초콜릿, 견과류 같은 여러 토핑을 원하는 만큼 얹은 뒤 무게를 달아서 계산하는 시스템이다.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한다.
일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며 티아나는 옆에서 계속해 말했다. ‘Yochi에서 같이 일하면 좋겠다. 정말로.’ 내 마음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