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친구, 내 친구, 우리 다 친구
티아나와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다정했다. 우리 생활에 불편한 건 없는지, 필요한 건 없을지 자주 물어주고 들여다봐 주었다. 덕분에 과분한 생활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종종 파티가 있고 주변에 사는 가족들을 불러 대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날도 있었기에 음식 냄새나 방문 너머의 소리가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티아나는 히로와 나를 불러 자신의 딸들이 일하는 아이스크림 가게, 요치에 가자고 말했다. 곧 잠을 자려했기 때문에 입고 있던 잠옷을 황급히 벗어던지고 나갔다. 티아나의 딸, 세레나와 애슐린은 자신들과 함께 일하는 워커들을 소개해줬고 그중에서도 가장 친한 몇몇 친구들도 데려와 인사시켜 주었다.
그러고는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아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런 곳에서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에 부푼 상상도 하면서 말이다. 늦은 저녁까지 하는 요치는 이 시간에도 줄이 어마하게 길었다.
“매일 이렇게 사람이 많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가 물었다.
“응…” 세레나와 애슐린, 그리고 친구들이 숙연해졌다.
이렇게나 바쁘다니! 가게 안에는 물론 문밖을 따라 건물을 한 번 빙 둘러서까지 줄 지어 있었다. 에이 그래도 이렇게 매일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퍼먹었다.
하지만, 요치는 호주 인기 요거트 아이스크림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어디에 있는 가게든 항상 사람이 많았다. 줄을 서다 포기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여기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인사를 끝으로 히로와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나도 일하고 싶다…”
“나도…”
- 작은 컵은 맛보기용
다음 날, 티아나는 퍼스 구경을 다녀오라며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라고 부추겼다. 그녀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를 제 자식처럼 대했다. 서둘러라는 말에 식빵을 욱여넣고 히로와 나는 정신없이 시티로 나왔다. 퍼스는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구름 하나 없는, 때 묻지 않은 그런 하늘. 높은 건물이 없는 곳에 가면 기분이 묘할 정도로 하늘이 너무 드넓고 커서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에 불과한 지에 대해 생각도 했었다. 멍하니 하늘만 봐도 이상한 날이 있었다.
퍼스에서 지내는 날들은 대부분 그랬다. 자연에 대해 생각하고 동물에 대해 생각하고 자연과 동물들과 어우러져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 그러다 한국과 호주에서의 나의 삶을 돌아보고 그려 보기도 했다.
퍼스 동물원에 가기 위해 지도를 켜서 길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대중교통 이용에 페리가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스완강을 건너기 위해서 마련된 건데, 버스나 트램처럼 교통 카드를 찍거나 종이 티켓을 구매해 타면 된다. 게다가 아침 6시부터 거의 밤 9시까지 운영하고 대략 15분 간격으로 다니고 있어 타고 다니기 편했다.
시드니처럼 관광 목적이 아니라, 정말 강을 연결해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한 페리라 사우스 퍼스나 시티 쪽을 가기 위해 페리를 탄다는 게 어쩐지 재미있었다. 동물원에 다녀오고 다시 시티로 페리를 타고 갔다. 걷다 보니, 커다란 건물 사이 쇼핑 아케이드가 있었다. ‘런던 코트’라는 곳이었는데 영국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뜬 건물이라고 했다. 안으로는 기념품 가게, 초콜릿 가게, 카페, 서점 등 작고 귀여운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호주 속 런던이라니. 꼭 모형 같기도 했다.
“와. 멜버른에 비하면 퍼스는 정말 작다. 그치?” 히로가 말했다.
“그러게. 여기가 시티의 끝인가?”
퍼스 시티는 생각보다 정말 작았다. 멜버른의 반 정도 되는 듯했다. 작고 아담한 거리들이 귀여우면서도 한적해서인지 심심한 느낌은 있었다. 반면 퍼스는 시티가 아닌 곳에서 재미를 찾기에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기대에 부풀어 갔다.
요치에서 메일이 왔다! 인적 사항을 작성하고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여러 문서를 읽었다. 규정이나 방침을 읽어보고 입사 관련 동의서 작성까지 마쳤다. 이제 곧 이다! 설레는 마음이 커지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됐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 영어를 말할 일이 많아지니, 내 실력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 어느 정도는 알아듣지만, 상대의 말이 길어지거나 빨라지면 한계에 맞부딪쳤다. 아마 일할 땐 더 하겠지 싶었다. 언어로 힘들 것만 생각하면 벌써 괴로웠다.
급하게 영어 공부도 시작했다. 언어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훅하고 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하면서.
“근데 나는 왜 그런 메일이 안 올까?”히로는 폰을 가져와 나에게 자신의 메일함을 보여주며 말했다.
“너 아직 안 받았어? 좀 늦나?”
그날 저녁에도, 그다음 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히로는 어떠한 메일도 받지 못했다. 티아나와 세레나, 애슐린도 히로의 메일함을 들여다보며 의아해했다. 왜 히로만 오지 않는 걸까? 하지만 며칠 뒤, 나 혼자 온라인 인덕션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가 이메일을 잘못 알려줬어…” 히로가 제 이메일 스펠링 하나를 빠뜨리면서 생긴 일이었다. 아무래도 히로는 너무 신났었던 거 같다.
그렇게 히로는 나보다 2주나 늦게 일을 시작했다.
세레나와 애슐린이 소개해 준 요치 친구들은 유쾌했다. 아직 같이 일을 해본 적도 없었는데, 세레나와 애슐린이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며 함께 가자고 불렀다. 퍼스에서 유명한 바다, 스카로보 비치에서 나이트 마켓이 열린다고 해 세레나와 애슐린, 그리고 요치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놀러 갔다.
서툰 영어를 하는데도 천천히 귀 기울여 주는 이 10대 친구들이 정말로 고마웠다. 그중에서도 베트남에서 온 18세 비아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내가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인형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안는 것도 뽀뽀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비아는 정말 웃기고 귀여웠다. 목소리도 또랑또랑하고 표정도 다양해서 가끔 말이 빨라 알아듣지 못할 때도 ‘흐음?’하고서는 또박또박 또다시 이야기해 주었다. 장난도, 웃음도 많은 비아가 나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 춤을 추기 위해 모인 사람들
케이팝은 얼마나 또 잘 아는지.
“헤이즐 너 이거 들어봤어?”
“이 노래 알지?”
하고 들려주는 노래가 전부 내 세대라 놀랐고 알고 보니 모르는 세대 노래가 없는 비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 세대에 맞춰주고 있었던 거였다. 그러고는 직접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춰주었다. 밝은 에너지에다 애교가 많은 비아와는 금방 가까워졌다.
비아를 비롯해, 그녀의 언니 그리고 요치 팀리더와도 친해졌다. 나이트마켓에 다녀온 이후에는 우리 집으로 가서 파티를 즐겼다. 틴에이저는 확실히 달랐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공짜로 보기 아까운 공연을 마음껏 펼치고 나서야 돌아갔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이게 매주 있는 일일 거라고는.
그땐 그저 즐겁기만 했다.
- 두 시간 동안 진행된 나를 위한(다고 말하는) 공연 ..
하루는 세레나의 대학 친구들과 애슐린의 친구들이 모여 파티를 연다고 초대받았다. 하지만 이 파티에는 타이틀이 있었는데, ‘각자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을 만들어 와 나눠 먹는다’는 거였다. 히로는 가라아게, 나는 떡볶이를 만들기로 했다. 아는 친구들은 물론 모르는 친구들까지 모여 같이 먹는다고 하니 긴장됐다. 세레나와 애슐린은 말레이시아 스타일의 사테를 만들었다. 분주한 부엌이었다.
각자 만든 요리들을 챙겨 티아나의 차를 타고 티아나의 엄마, 세레나와 애슐린의 할머니 댁으로 갔다. 신기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여행 가신 틈타서, 약 40명 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파티라니. 흔쾌히 허락한 할머니, 할아버지도 신기했고 이런 파티를 주기적으로 연다는 세레나와 애슐린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착한 할머니네는 티아나네 보다 컸다. 방이 얼마나 많은지. 통로와 복도가 많아서 나는 길 잃을 걱정도 했다. 파티룸 같은 것도 있었는데,
“우리 여기서 클럽 파티를 하자.”라며 비아가 들뜬 채 말했다. 미러볼을 비롯해, 노래방 기계, 커다란 풍선들도 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전부 모이고 이제 먹는구나 싶었는데, 아니란다.
“자- 여러분 이제부터 영상을 찍을게요.” 세레나가 마치 회식장에서의 어떤 팀장처럼, MC를 보는 사람처럼 앞으로 나가, 지금부터 무슨 영상을 찍는지 알려주었다.
자기가 만든 요리를 들고 자신의 이름과 국적을 소개한다. 그리고 음식을 들어 올려 보여주며 음식에 관해서도 알려준다. 그렇게 찍은 영상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세레나가 편집한다. 그리고 그걸 SNS에 올린다고 했다. 요리 소개를 마치니 왜인지 기운이 쭉 빠졌다.
티아나는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 다음으로 아마 네 나이가 제일 많겠지?”
“응… 그렇지.”
“재미있게 즐기고 있어?”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 거 같아 보였는지 티아나는 옆에 앉았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점점 무거워져 가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커다란 파티는 한 번으로 족했다.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