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
드디어 요치에서의 첫 출근.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가게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어떤 포지션이 있는지 듣고 기계 작동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를 배웠다. 지금이야 익숙해진 것들을 기억하고 써내려 가지만, 처음에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많은 양의 정보를 넣으려고 하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외울 것도 어마하게 많았다. 휘몰아치는 설명들과 읽어봐야 할 수많은 자료 그리고 별의별 기계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것들에 관한 작동법도 전부 알고 있어야 했다. 이거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먼저, 출근을 하면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뒤, 앞치마를 매고 백룸으로 들어간다. 백룸 벽면에 걸린 패드에서 출근 사진을 찍고 나면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뜨면서 출근 인증이 된다. 그리고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 오늘 나의 포지션이 뭔지 확인한다.
- 첫 출근 !
포지션에는 크게 FOH, BOH, POS, TOPPING 이렇게 네 가지 역할로 나눌 수 있다.
먼저, FOH는 Front Of House의 약자로 손님을 직접 대하는 역할을 말한다. 매장 내 테이블 정리나 홀 전체를 청결한 상태로 유지하는 거였다. 하지만 주 업무는 요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손님과의 대화’를 잘 해야 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손님의 하루나 기분에 대해서 묻는 걸로 시작해, 그 사람의 옷차림이나 지닌 물건 등을 통해 직업을 유추해 대화를 끌어내야 한다. 그 외에도 손님맞이 메뉴얼이 다양한데, 이건 대체로 웨이팅 줄에 서 있는 사람을 컨트롤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웨이팅의 가장 앞자리에 서서 아이스크림 기계를 이용하기 전까지 손님들이 줄을 벗어나지 않고 통제받는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아야 하므로 스몰토크를 계속 이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맛보기 아이스크림을 권하고 요치에 대한 좋은 경험과 인상을 주기 위해 힘써야 한다. 사람 간에 대화를 좋아하는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역할이지만, 이걸 영어로 하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손님과 제일 많이 대면하는 포지션이다 보니, 이런저런 질문이 엄청나게 들어온다.
“여기 무슨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이건 글루텐 프리 맞아?”
“아기가 알레르기가 있는데 먹어도 돼?”
호주는 알레르기에 대한 인식이 높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알레르기에 관한 질문이 들어온다. 아이스크림 맛도 다양하고 토핑 바에 준비된 토핑만 하더라도 30가지가 넘었으니, 전부를 외울 수도 없었고 체크해야 하는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올려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백룸으로 뛰어 들어간다.
들어가서 아주 두꺼운 파일을 꺼내고 미친 듯이 넘겨본다. 이 순간 엄청 다급해진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줄이 흐트러져 아이스크림 기계를 너도나도 사용한다고 붐벼지고 그러면 컴플레인부터 시작해, 토핑바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잠시라도 비울 때는 꼭 가까이 있는 다른 워커에게 말하고 비워야 했다.
겨우 찾아 보여주면, 그때부터는 이제 스피킹 테스트 시작이다.
“그럼, 다른 재료로 어떤 걸 추천해?”
“이런 거랑 비슷한 맛이나 식감있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는 토핑바에 어떤 게 준비돼 있는지조차도 제대로 몰라서 설명을 못 했다. 잘하고 싶은데 입은 또 얼마나 안 따라 주던지. 모르는 것도 모르는 거지만, 말이 술술 나오지 않는다는 게 답답했다.
그래서 사실 영어 실력을 늘리기에도 재미있게 일하기에도 FOH만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매장이 바빠 사람들의 컴플레인은 수도 없이 들어오고 저런 식으로 질문 세례를 당하거나 줄도, 내 말도 무시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삿대질하는 인도인, 아직 이용 중이라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대도 밀어버리고 가는 호주 청소년들, 맨발로 들어와 소리 지르고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다 가는 아저씨 등 아직도 기억나는 몇몇 사람들 덕에 여긴 가장 맡고 싶지 않은 포지션이 됐다. 그건 모두가 다 똑같은 마음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화이트보드 앞에 서는 게 제일 떨리는 일이었다.
‘제발 FOH만 아니길.’ 빌면서 스태프 룸을 빠져나왔다.
그에 비하면 BOH(Back Of House)는 심리적인 스트레스는 별로 없는 곳이었다. 깡깡 얼어 있는 요거트 백을 박스에서 분리해 낸 뒤 물류가 들어온 날과 요거트 마사지 시작하는 날을 적어두고 요거트 마사지를 하면 된다. 요거트 마사지란 커다란 싱크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서 요거트 백을 넣고 얼린 부분이 만져지지 않을 때까지 손으로 조물조물 안마해 주는 걸 말한다. 이거만큼 쉬운 일이 없다. 하지만, 한 번 할 때 커다란 요거트 백 마사지를 20개가량 해야 했기 때문에 끝나고 나면 손이 퉁퉁 부어있는 건 기본이었다. 그러고 나서 박스에 다시 넣고 포장한 뒤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를 하는데 그러면 잠자던 근육들이 불끈 깨어났다.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끝나면, 이제부터 아이스크림 기계를 관리해야 했다. 아이스크림 기계를 열어 작동이 잘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막힌 구멍이나 헛도는 스틱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기계를 체크하는 데, 처음에는 기계 옆에 붙어있는 주의 사항들과 기계를 다루는 법, 에러가 났을 때 처리하는 방법들을 읽고 숙지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럴 땐 주로,
“미안한데, 이거 사진 좀 찍어가도 돼?”라고 물었고
“그거를 왜..? 찍어도 돼!” 의아해하면서 허락해 주는 워커들이었다.
- 내가 청소한 백룸
왜 굳이 찍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매니저도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꼼꼼하게 다시 봤다. 왜냐하면 나는, 나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까! 그렇게 막 읽는다고 한 번에 외워지지도 익혀지지도 않으니까! 몇 배로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POS는 말 그대로 포스기 앞에서 계산해 주는 걸 말한다. 포스가 상대적으로 가장 쉬운데, 왜냐면 뱉는 말이 주구장창 똑같기 때문이다.
“안녕, 아이스크림을 저울에 올려줘.”
“우리 요치 멤버야?”
그렇지만, 포스는 아주 잠시도 쉴 수 없다. 웨이팅 동선이 살짝 꼬여서 텀이 생기는 일이 생기면 몰라도, 손님이 끝도 없이 몰리기 때문에 흔히, 아르바이트할 때 많이 쓰는 말, ‘쳐낸다’라고 하는 게 불가능한 곳이었다. 포스는 클로징 팻말을 돌릴 때가 되어야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 정산하다가 본 백원
마지막으로 TOPPING, 제일 재미있는 일이다. 토핑은 토핑바를 총괄하는 일을 말한다. 계속해서 토핑이 떨어지지 않도록 채우고 프렙을 한다. 중간중간 토핑바가 더럽지 않은지 체크하고 구워야 하거나 데워야 하는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두고 소스들을 쓰기 좋게 소분하는 등을 한다.
이 밖에도 내일 쓸 토핑도 준비하고 토핑 관련한 책자를 보면서 브라우니나 쿠키 컷팅 그리고 과일을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 준비해 두면 된다. 재미도 물론 가장 마음이 편안한 일이기도 했다. 가끔씩 손님들과 대화하고 토핑도 추천해줄 수도 있어 부담 되지 않으면서도 뿌듯한 일이었다. 토핑 바는 꼭 두 사람이 함께하므로 짧게나마 이야기를 하면서도 가능했고 가끔은 손님들이 좋아할만한, 토핑을 내가 골라서 준비할 수도 있었다. 인기가 많을 때면 덩달아 기분이 좋았고 토핑과 관련해서 질문이 들어오면 아무래도 함께 일하는 팀원의 응대를 들으면서 배우는 것들이 많아, 좋은 공부가 되기도 했다.
- 키위 프랩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면, 오늘 맡은 역할에 따라 청소 구역도 나뉘게 된다. 청소를 관련해서 말하자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줄줄이 나열해야 해 줄이도록 하겠다. 오늘 맡은 역할에 따라 청소 구역이 나뉘었다. FOH는 홀, BOH는 키친, POS는 머신, TOPPIG은 토핑바 내 기준상 업무 강도로는 FOH > POS > BOH > TOPPING 이라면, 청소는 그 반대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다 똑같은 거다.
영어도 엉망이고 제대로 하는 게 맞는 건지 싶으면서도 이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했다. 호주에서 일을 구하려면, 트라이얼이라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 쉽게 말해, 시범적으로 일을 해보는 걸 말한다. 이 과정에서 걸러지는 경우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티아나 집에 살기 때문에, 티아니의 딸 세레나가 총괄 매니저인 덕에, 쉽게 기회를 얻었다. 쉽게 온 기회인 만큼 몇 배로 열심히 해야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됐다. 씻고 누우면 12시가 넘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다시 일터로 돌아가 오늘 맡은 일의 역할극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말했으면 좋았을지, 어떤 말을 해야 했는지 찾아보고 익혀두는 거다. 덕분에 요치에서 일할 당시에는 영어가 조금씩 늘어가는 거 같았다. 살기 위한 생존 영어 말이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이 시간이 괴롭게만 느껴지지 않았으면 했다. 여러모로 배울 것들이 많은 곳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히로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말했다. 히로는 장난스럽게
“먼저 잘 배워두고 나중에 나 좀 가르쳐줘… 알았지?”불쌍하게 말했고
“아 진짜 부럽다. 너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 나는 히로가 부러웠다. 내가 열심히 배워서, 열심히 가르쳐 줄 테니까.
많은 친구가 배려를 해줬다. 티아나의 부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차를 가진 시간을 맞는 친구가 있으면 집에 데려다주고는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몇몇 친구들도 데려다주고는 했는데, 더해서 폐를 끼치는 거 같아 마음이 썩 편하지 않았다. 날마다 감사의 인사를 보내고도 항상 이렇게만 지내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티아나가 말한 멀지 않다던 요치는 차로 멀지 않은 거리였지, 버스로는 그렇지 않았다. 멜버른에는 시티 내에 무료 트램이 자주 다녀서 어딘가에 가는 게 걱정스럽지 않았다. 갈 수 있는 곳도 많았다. 하지만 퍼스의 경우에는 트램이 없었다. 시티 내에서는 무료 셔틀버스가 있긴 했지만, 외곽에 사는 우리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조건 버스 아니면 택시를 타야 했다. 택시비가 비싼 호주에서 매일 마다 택시 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가끔 아침에는 택시도 잡히지 않아 애먹은 적이 많았다.
출근 시간도 크게 네 타임으로 나눠져 있는데, 스케줄에 따라 출근 시간이 달랐다. 오픈이면 7시까지는 가야 했는데 버스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애매한 시간대였다. 어쩌다 몇 번 탔는데 반 이상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냥 사라진 적도 있었다.
그럴 땐 비싼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그 외 11시나 2시 출근에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를 탄다고 할 땐, 두 번 갈아타야 했고 가는 데만 1시간이 더 넘었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했는데, 버스 노선도 자주 있는 게 아니라 맞춰 타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혼자 퇴근하는 거라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버스를 타면, 일찍 마쳤다고 해도 도착하면 9시나 10시쯤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일하는 곳이 호주의 문화를 몸소 겪고 영어를 마음껏 배울 수 있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아직은 버틸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