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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라즈베리

좋은 장갑을 구해야해

by euuna








데본포트를 떠나 우리는 다시 호바트로 갔다. 짧았던 호바트살이가 참 아쉬웠는데, 이렇게나 빨리 돌아올 줄이야. 호바트 거리는 한 번 와 봤다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어제 아침, 시호는 전부터 계획해 둔 멜버른 여행을 떠났다. 시호의 짐도 함께 챙겨 나온 나와 히로는 먼저 호바트로 향했다.

“라즈베리는 처음이라 그랬죠!”

“네네!”

“걱정할 거 없어요. 어렵지 않아~”

장난기 많고 시원한 성격을 지닌 컨트랙터, 리오는 그의 친구와 함께 우리를 태우러 왔다. 잔뜩 겁먹은 히로를 향해서도 밝은 인사를 건넸다. 시호가 오기 전, 둘이 먼저 일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고민도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시호를 기다린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미리 익혀두면, 시호를 가르쳐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시 숙소라 짐은 완전히 풀지 않는 게 좋겠다는 리오의 말에, 불현듯 울굴가가 생각났다. 설마, 또 집이 없을까 봐.


당장 내일이 인덕션이었다. 이로써 두 번째 인덕션. 생각지도 못한 라즈베리지만, 결국 왔다.

“우리 그래도 라즈베리 경력직이잖아.” 히로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고작 하루 한 거 말하는 거지…” 히로는 재미없었나 보다.

하루라도 아예 모르는 거보단 낫지 않냐며 깔깔 웃었다. 그래,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결국 적응해 내겠지. 안 그러고 배길까. 부딪치다 보면 실력이야 늘기 마련이고 겁나는 이유야, 익숙하지 않아 그런 걸 뿐. 이것도 전부 한 때고 한 낱이라 결국 지나갈 일이었다. 미리 걱정할 이유도, 겁먹을 것도 아니다.





인덕션 등록을 마치고 조회를 들었다. 여기는 애초부터 미니멈 아울리를* 기본으로 하는 농장이다. 피스레이트* 농장에 갈 걱정은 없었지만, 마음 편히 연습해 볼 기회도 없었다. 여기는 블루베리 농장보다 2시간이나 일찍 출근해야 했다. 어두컴컴한 새벽 5시, 픽업 차를 타고 농장으로 이동한다. 이렇게나 깜깜한데, 라즈베리를 딸 수 있다고…? 20분간의 조회가 끝으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 여기는 또 얼마나 뜨거울까.

* 미니멈 아울리 농장 : 시간당 보장된 최저임금을 받는 농장

* 피스레이트 농장 : 수확량이나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받는 농장

리오는 조회를 듣던 우리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가까이 와 속삭였다.

“저는 딸기 슈퍼바이저라 딸기 농장으로 가요. 라즈베리에 가서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따요! 알겠죠?”

힘찬 그의 말에 힘차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파이팅!”

“파이팅!!”

긴 장화를 신고서 두 손으로 주먹을 꼭 쥐어 보이며 손을 흔들고 가는 그에게, 히로와 나도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각자 일 시작하세요!’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 잠깐만 왜 달리지?

드넓다 못해 아득한 농장에서 워커들은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게 뭐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나와 히로도 우선 뛰고 봤다. 뭐지? 일을 시작하기 전 몸을 데우기 위한 걸까?


- 새 집에서의 아침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쟁탈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달리는 게 조금 신기하다 싶었다. 그래도 따라 달리며 ‘하하하’하고는 웃었다. ‘여기는 이런 아침을 보내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머지않아 사라졌다. 그들은 줄지어 세워져 있는 트롤리를 향해 갔다. 여기는 트롤리를 사용하는 농장이었다. 커다랗고 무거운 트롤리를 끌고 로우에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이렇게나 뛴 이유는 상태가 좋은 트롤리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쟁탈 맞잖아. 이럴 수가. 설마 매일? 허리춤에 차던 바스켓이 그리웠다.


아무튼 히로와 나는 이상한 트롤리 하나를 주워와 덜덜덜덜거리며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각자 로우를 배정받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슈퍼바이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기다란 검정 야상에, 반짝이는 부츠, 머리를 한껏 틀어 올리고 선글라스를 낀 채,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서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꽤 엄격해 보였다. 그리고 다나까체로만 말했다.

‘이해하셨습니까.’, ‘아시겠습니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군대에 왔다고 생각하자.


그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히로에게 ‘일본어로 말하는 게 편하려나?’ 조용히 읊조리더니 일본어를 술술 해냈다. 다행이었다. 히로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마저도 싹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





지금까지 농장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이곳은, 난이도 ‘상’ 농장이다. 아, 어쩌면 ‘최상’일지도. 이곳은 호주의 대형마트에 유통하는, 엄중하게 엄선된 과일을 파는 농장이다. 과일계의 유명 브랜드라 그런지, 농장 규모도 말도 안 되게 컸다. 어떤 농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베리류를 취급하는 농장 중에서도 가장 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장의 크기는 다양하지만, 타즈매니아를 대표하는 농장들은 약 65헥타르 정도이다. 하지만, 이곳은 무려 약 121헥타르라고 한다. 농장 내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패킹 쉐드도 완비되어 있었다. 패킹 쉐드란 현장에서 수확한 베리를 바로 포장하는 시설을 말한다. 지금까지 일했던 농장 중에서 가장 컸다.




각자의 로우를 배정받은 나와 히로는 서로 등을 마주한 채 들어갔다. 여기는 혼자서 해야 한다. 블루베리 농장에서처럼 하나의 로우에 두 명이 들어가 같이 끝내는 것이 아니라, 들어간 로우 전체를 혼자 해야 했다. 트롤리에는 트레이를 챙겨서 다녀야 하는데, 트레이는 우리가 양껏 가져와 조립해야 한다. 조립한 트레이 하나를 트롤리 아래에 배치해, 무르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열매를 버려야 한다.

나머지 조립한 트레이 안에는 퍼넷을 펼쳐 두어야 한다. 퍼넷이란 과일이나 채소를 담는 작은 포장 용기를 말한다. 12개의 퍼넷을 펼쳐 두고 그 안에 라즈베리를 적당한 양으로 분배해 넣어야 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 따야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베리를 중간 제출해야 한다.

이곳은 슈퍼바이저를 기준으로 10명 정도 되는 인스펙터가 움직인다. 인스펙터란, 작물의 상태를 수시로 검사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트레이 안에 펼쳐진 퍼넷 속 라즈베리를 살펴본다. 상태, 색상, 모양, 크기, 무게 등을 체크하며 경고를 주기도 하고 걸러 내기도 한다.




열매를 따기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인스펙터가 왔다.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연하지 첫날인데.’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열심히 하겠습니다!’하고서 계속해서 땄다. 인스펙터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슈퍼바이저가 찾아왔다. 속도를 더 내야 한다는 경고를 들었다. 히로와 나는 서로 서둘러 트롤리를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한번, 블루베리는 정말 껌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블루베리를 딸 땐 천국이었다. 천국, 난 이런 표현도 스스럼없이 하게 됐다. 라즈베리는 온통 가시나무다. 뾰족하고 짧은 가시가 손가락에 박힐 때마다 어찌나 따가운지 나도 모르게 그만, 장갑을 벗고 손을 보곤 했다. 한시가 급한데 말이다.

이 농장의 라즈베리 나무 높이는 매우 컸다. 150센티인 내 키는 당연히 훌쩍 넘었고175센티의 히로도 손을 뻗어가며 땄으니, 위에까지 깔끔하게 딴다는 게 어려웠다. 보다 못한 슈퍼바이저는 작은 발판을 가져와 들고 다니라며 건네주었다. 정말이지 올라갈 시간도 아까운데! 트롤리 미는 걸로도 모자라 발판도 챙겨 다녀야 한다니.


- 양손무장



여기서 가장 무서운 점은, 라즈베리 나무를 한 번 꺾으면 경고, 두 번 꺾으면 오늘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거다. 이 말은 집에 가야 된단 말이다. 라즈베리 나뭇가지를 꺾는 건 정말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했다. 잎을 뒤적거리다 가도, 손으로 베리를 살짝 집다 가도, 너무 높아 줄기를 살짝 당겼다고 순식간에 부서지기 일쑤였다. 블루베리는 원숭이처럼 올라타 매달려도 부서질까 말까인데, 어쩜 이렇게나 예민한 나무가 다 있냐는 말이다.

가시가 없던가, 낮게 자라던가, 가지가 튼튼하든가 예민하더라도 하나만 할 것이지 두루 갖춘 나무였다. 나무를 잡는 것에도 애를 먹었고 혹시라도 부러뜨릴까 봐 긴장됐다. 아주 작은 장점이라고는 블루베리에 비해 로우가 짧다는 거였다. 그러면 금방 나올 수 있겠지. 잘하게 된다면..

하지만, 이 로우 안은 엄청나게 어두침침했다. 천막이 해를 가리고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무도 노래를 듣지 않았다. 아무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오직 나무 뒤지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러니 나무 부서지는 ‘뿌득’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가지가 부서지면 여러 잎 사이로 숨기면 되지 않나 싶지만, 슈퍼바이저와 인스펙터가 하는 역할 중에는 나무를 뒤지는 것도 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모양새를 띄고 있으면 꼭 들춰보고는 했다. 처음 부셨던 날에는 정말 가시는 모르겠고 티셔츠 안에라도 넣어 숨겨버리고 싶었다. (사실 바지 주머니에 한 번 숨기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10명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중간중간 슈퍼바이저는 몇 명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는지 안내했다. 너무 느려도 집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럼 둘 중 하나였다. 가지를 다 부러뜨리고 속도를 낸 후 들키기 전까지 따다 집으로 돌아가느냐. 속도 무시하고 조심히 따, 나중에 잘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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