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것과 듣는 것
'귀 피를 흘리는 여자'라는 TV 단막극을 본 적이 있다.
듣기 싫은 소리가 들리면 귀에서 피가 나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듣기 싫은 상사의 잔소리, 성희롱 발언, 심지어 결혼식에서 주례사를 들었을 때도
그녀의 귀에서는 피가 나왔다.
귀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대응하는 것.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산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자는 하고 싶은 말을 그저 참아내며 피를 흘린다.
여자의 불편함은 피가 흐르는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속마음을 숨길 보호색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쏟아질 비난을 감당해야 함은 가히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싫든 좋든 다양한 소리를 들어야 하고 때론 긴 시간을 참아내야 한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이란 말이 있듯이 때론 누군가와의 대화가 불편하게 다가올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이 녹록지 않은 현실에선 듣기 싫은 소리들을 참아내며 잘도 거짓으로 포장하며 살고 있다. 잔소리니 그만하라고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는 특권은 사춘기 때 종료됐다.
이유가 어쨌든 누군가의 말을 참아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누군가와의 대화 중에 만약 귀에서 피 나올 것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어떨까?
듣기 싫어하는 상대방은 한편 속내를 드러내 시원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귀에서 피 나오기 직전까지 만든 당사자는 내심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둘 중 누가 더 불편한 상황인 걸까?
나는 말을 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말하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긴다.
어쩌면 강사라는 직업이 이리도 행복하고 즐거운 이유는 주어진 시간 동안 쏟아내는 말의 향연이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하곤 한다. 솔직히 합리적인 의심이다. 누군가는 의심의 여지도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긴 강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을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와도 내 입은 쉴지를 모른다.
강의 때야 열정적인 강사라는 듣기 좋은 평이 돌아오지만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이 갖는 말 못 할 고통을 실상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왔다.
스스로 대화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대화를 내가 이끌고 있을 때였다는 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실감하는 경우는 차고 넘쳤다.
나는 얘기의 주도권을 내가 잡았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타입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내 말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도 나름 눈치가 있다. 다만 원치 않는 주제의 얘기를 그저 듣고만 있을 때 참아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친구들 모임에서 자식 얘기로 넘쳐날 때, 관심조차 없는 명품 얘기로 커피숍에서 소중한 나의 시간을 죽일 때, 때론 나와는 상관없을 부부 싸움의 전말을 들어야 할 때가 그렇다.
간혹 막내 이모와 통화할 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쏟아내는 이모의 넋두리를 얼마나 힘들어했었는지.
그때는 이모한테 상처 주지 않으면서 얘기를 마무리 짓는 방법을 생각하느라 이미 이모의 말은 들리지 않곤 했다.
"이모, 나 지금 빨리 거래처에 제안서 보내야 해서...
미안. 다음에 우리 다시 통화해."
그렇게 핑계를 대고 끊지만 마음 한구석은 한동안 불편했다.
행여 듣기 싫어한다는 걸 들키진 않았는지.
이모가 상처받지는 않았는지.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들어줄 걸 하는 후회감마저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모와의 대화가 힘들다.
대화에서의 말의 분배는 늘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듣는 포지션이 되고, 다른 이는 말의 질주를 시작한다.
중간에 틈이 보여 인터셉트(intercept) 한다 해도 이내 다시 주도권을 뺏기기 일쑤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면 두 사람은 각각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고백하건대 나는 주로 말을 하는 입장이라 듣기만 한 사람의 입장을 잘 몰랐다.
그렇다고 내가 듣는 것을 게을리한다는 건 절대 아니라고.
절대 내 말만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주로 이야기하는 사람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많은 말을 한다는 건 그만큼 후회도 늘어간다는 뜻이다.
특히나 누군가가 듣기 싫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나면 그 사람과의 대화는 항상 눈치작전이 수반된다.
언제 어느 순간에 대화를 마쳐야 할지를 생각하고 또다시 내가 오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머릿속은 이내 복잡해지곤 한다.
대부분 대놓고 내게 표현한 경우는 없어서 어쩌면 눈치 없이 수다를 떨어대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직업병이라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내는 것이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날 컨설팅 회사 대표이자 나의 프리랜서 시절을 함께 한 강사님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녀온 강의 현장에 대한 피드백이라는 특별한 주제로 시작했던 통화가 결국 내 질주하는 수다본능이 폭발했고 40분 정도 흘렀을 때
"강사님 저 귀에서 피 나올 것 같아요!"라는 말이 나의 수다에 인터셉트를 했다.
순간 쥐구멍은 이럴 때 찾는다는 걸 실감했다.
"죄송해요 강사님.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서둘러 전화를 끊었지만 민망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강사님과 대화를 하거나 통화를 하게 되면 어디쯤에서 끊어야 할지 눈치를 살핀다.
주로 상대 쪽에서 적절히 끊어주지만 아무리 자연스럽게 한다 해도 티가 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자책하는 시간도 함께 찾아온다. 이 망할 놈의 혀.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적당히 말을 하고 그만큼 적절하게 듣고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 눈치작전으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기꺼이 눈치라도 봐야 한다.
여전히 나는 어디서나 말이 많고 듣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양 조절을 한다.
특히나 누군가 힘들게 내뱉을 수밖에 없는 묻어둔 말이라면 기꺼이 내 입에 지퍼를 닫고 공감하며 들으려 애쓴다. 내가 누군가의 귀를 짓무르게 할 정도의 말을 뱉어낸 대가라고 해도 상관없다.
말하기만큼이나 듣기가 중요하다고 강의하는 자로서의 양심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겐 그런 노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민망하고 창피하긴 했지만 그때 그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누군가의 귀에 피가 나는 줄 모르고 떠들어 대고 있지 않을까?
오늘도 하루에 쏟아 낼 단어들을 줄이려는 고군분투는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