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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pr 07. 2021

왜 울면 선물 안 줘요?

우리에겐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오래전 신문 기사에서 일본의 한 호텔이 여성 전용 '눈물방'을 출시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호텔은 보도자료를 통해 " 우리는 여성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을 제공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중국에서는 우리 돈 약 7,500원 정도를 내면 속상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실컷 울고 갈 수 있는 '눈물방'도 있다고 한다. '눈물방'에는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는 슬픈 노래와 영화는 물론 양파, 파 그리고 눈물을 닦을 수 있는 넉넉한 티슈까지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눈물방'이 존재한다는 것도 특이했지만,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낼 도구로 양파까지 동원되었다니

웃픈 현실이 아닌가.


울고 싶으면 울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실상 우린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면 우는 아이에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준다며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선물이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어린 시절부터 우린 울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하고 살았다.

남자라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우는 횟수를 세 번만 허락한 사람은 또 누구란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울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대를 들이대어 그것을 참아내며 살고 있다.

더 버티지 못하고 터져 나온다 해도 구석진 화장실을 찾아야 하고 내 방 이불속에서나 허락되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그마저도 소리 내서 엉엉 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발가벗겨져 광장에 내쳐진 나를 보는 것처럼 경멸의 시선은 두렵기까지 하다.

어떤 이는 "나는 괜찮다. 괜찮다"를 되뇌며 살다 보니 이제는 눈물조차 메말라 버렸다고 했다.


왜 울면 안 되는 걸까?

왜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는 걸까?

울지 않는 것이 착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등호는 누가 만든 것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눈물을 흘릴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행여 술자리에서 술을 무기 삼아 눈물을 흘렸다가는 주사로 치부해버리기 일쑤다

각 잡고 앉아서 인생을 논하며 우아하게 눈물을 글썽여야 용서되는 눈물이라면 애초에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눈물은 그렇게 의도대로 참아지거나 조절되지 않는 거 아닌가.

억울해서 울고 싶고, 화가 나서 울고 싶어지고, 슬플 때도 눈물은 속도 없이 튀어나오는데 참아내야 하는 게 당연한 사회가 돼버렸다.

자의든 타의든 나 역시 대부분 혼자만의 공간에서만 운다.

그래야 강한 사람이고 그래야 어른스러운 거라고 나 자신을 달래 가며 난 눈물을 잘도 참아냈다.


그렇게 참아 낸 결과는 어느 날 찾아온 공황장애였다.

프리랜서가 되기 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내 직속 상사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우리 부서의 직원을 내 자리에 앉히기 위해 무던히도 나를 괴롭혔다. 내가 스스로 나가주기를 바랐었다.

직원에게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하고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시키더니 급기야 나를 빼고 야유회를 계획했다.

당시엔 토요일도 근무했었는데 출근해보니 나만 빼고 모두가 야유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일부러 나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시켰다는 사실이 더 경악스럽다.

그날 아무도 야유회는 가지 못했다. 직접 대표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부당한 행위에 대해 항의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 사건으로 난 회사에서 입지가 더 작아졌다. 당당한 내 모습은 그들에겐 '센 여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 그저 다루기 힘든 여자일 뿐이었다.

문제는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참아냈던 감정과 눈물이 한순간에 봇물터지듯 터져버렸고 공황장애라는 이름으로 표출됐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1년 동안 병원에 다니고 의사의 충고대로 결국 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됐던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울었어야 했다. 그것도 제때 감정에 충실하게 울었어야 했다. 어쭙잖게 참아냈지만 결국 일자리도 건강도 잃게 만들었다.

그 후로 난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따르기로 했다. 가끔은 일부러 울기도 한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여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안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기어이 밖으로 끌어내서는 정체 모를 감정이 몽땅 소모될 때까지 소리 내서 울곤 했다.

실컷 울고 난 후의 그 개운함이란 겨울 온천에 몸을 담그고 나와 마시는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 그 이상의 시원함을 주었다.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몸은 감정의 변화가 생기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과다한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한다.

이때 눈물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눈물을 참는 건 인내가 아니라 내 몸에 독소를 쌓아 놓는 것과 같다.

내가 느꼈던 그 후련함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님이 일본의 아리타 히데오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히데오 교수는 뇌파, 안구운동, 심전도 변화를 관찰하는 연구를 통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지만 흘리고 난 후에는 평상심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점을 발견했다.

눈물은 우리 몸의 자연 방어기능인 동시에 감정의 표현인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결코 약해서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내 몸이 내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이다.

굳이 남 앞에서 대 놓고 울 필요야 없겠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울든 울지 않든 아이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눈물의 횟수를 강요받지 않아도 된다.

그 누구도 울지 말라고 강요할 자격은 없다.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다. 그것은 오롯이 우리의 자유의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만큼은 내 감정에 귀 기울여 주고 온전히 감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토닥이고 감싸줘야 한다.

우리는 충분히 울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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