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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pr 15. 2021

왜 아이디어는 자기 전에만 생각나는 걸까?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서...

메모하는 습관은 건망증이 준 선물이다.

뭔가 생각날 때마다 적어두지 않으면 도통 기억해 내는 일이 쉽지 않다.

별로 기분 좋은 별명은 아니지만 몇몇 친구들은 나를 '수첩공주'라고 불렀다.

메모는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하는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새로운 일정이 생기거나 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스케줄러에 적어 놓아야만 한다.


나이를 핑계대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중요한 일들부터 소소한 생활에 필요한 것들까지 일일이 적어놓지 않으면 아무것도 처리할 수 없다.

심지어 월요일마다 오는 우유 챙기는 일을 잊어 우유가 상한 적도 다반사다.

이러다 보니 매주 월요일 일정표에 '우유 챙기기'가 반복 알람으로 되어있을 정도다.

분명 오전 운동을 하면서 오늘 점심엔 냉장고에 있는 채소들을 없애기 위해 볶음밥을 해 먹겠다고 친구에게 얘기해놓고 라면을 끓여 먹은 적도 있다. 며칠 뒤 채소들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지인들과의 약속, 강의 일정, 가족들의 생일들로 내 스케쥴러는 더 이상 쓸 곳이 없을 정도로 넘쳐 난다.

그날그날 처리해야 할 사소한 것들은 따로 노트에 적어 놓고 마칠 때마다 줄을 긋는다.

그렇게 해도 빼먹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은 쿨하게 애교로 넘긴다. 인생 뭐 있나. 

오늘 못하면 내일 해도 되는 일은 차고 넘치니 말이다. 


다행스러운 건 일과 관련된 것은 그나마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는 점이다.

준비하는 과정 중에 여러 번 확인하고 얼마나 걸리는 거리인지 체크하고 주차장의 유무를 확인하면서 반복 학습되는 듯하다.

또 하나 감사한 것은 메모해서 기억하는 모든 일에는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다.

약속에는 늦은 적이 없고 생일 같은 기념일은 며칠 전부터 준비해서 챙긴다. 

어떻게 자기 생일까지 기억해주냐며 감동받았던 친한 동생은 아마도 나의 망할 기억력을 안다면 기겁할 수도 있겠다.

스케쥴러나 수첩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어땠을까?

내 주변에 늘 볼펜과 작은 수첩, 아이디어를 적을 노트, 핸드폰이 함께 하고 있음이 감사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문제는 '아이디어'였다.

글을 쓰고 싶은 소재나 제목이 급작스럽게 떠오를 때가 있다. 

혹은 강의 때 접목하면 좋을 에피소드 같은 경우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떠오른다. 

어디 숨어있다 이제야 나오는 건지. 행여 놓칠세라 보이는 어딘가에 미친 듯이 적어 놓는다. 

너무 급하게 휘갈겨 쓴 내 글씨를 내가 못 알아볼 정도로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한다. 

그 망할 놈의 (아니지 세상 중요한) 아이디어는 하필 잠들기 직전에 대량 생산된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눈은 이미 반이상 감겨있기 일쑤고 오랜 불면증 때문에 그 시간을 놓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이다.

속으로는 '적어야 해. 지금 생각났을 때 적어야 해'라고 생각하지만,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눈꺼풀이 말을 건다.

'이렇게 중요하고 생생한 생각이 자고 일어난다고 잊힐 리 없어. 지금 잠을 깨면 넌 새벽까지 못 잘걸.'

결국 눈꺼풀의 유혹에 넘어가 나는 믿어서는 안 될 내 기억력에 또 속고 만다.

기억이 날 리가...... 없다. 

내 기억에 남은 것이라곤 그 아이디어는 찬란하고 대단했다 정도였을 뿐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더 놀라운 건 그 일의 수없는 반복이다.


세상 어떤 멍청이가 그렇게 무한반복으로 같은 실수를 할까?

스스로를 자책해도 자기 전에 생각났던 수많은 생각들은 자취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미 잊힌 기억이라설까. 

단어 하나 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면서 나는 감히 그 아이디어가 대단했다고 신포도를 보는 여우처럼 말한다. 때마침 기억이 돌아와 별 거 아닌 것임을 알게 될 일 따윈 그래서 민망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음을 알기에 부리는 객기일 것이다.

설사 별거 아닌 것들이라 해도 여전히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머리를 쥐어짜서라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미 다른 이에게 날아가 버린 파랑새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럴수록 더더욱 수첩과 볼펜과 핸드폰을 움켜쥔다.


행여라도 조각났던 그 기억들이 일부 돌아온다면 이번만큼은 반드시 붙잡아 가두고 말 테다. 

나에게로 다시 와 다오.

내가 빛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해볼게.

내가 기억력은 안 좋아도 잊지 않는 것에는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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