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비 Jun 18. 2021

거 좀 조용히 갑시다.

선은 넘지 말라고 존재한다.


『친구가 야근하고 새벽 3시에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가 주입식 유교 사상으로 말하는 걸 씹을 수가 없던 친구가

살살 대꾸해 주고 있었다.

택시기사: 이 시간까지 야근하는 거 보면 썩 좋은 직업은 아닌가 봐?

친구: 네 그러네요. 우리 둘 다 힘내요.

택시기사: ......   』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깔깔거리며 웃던 나는 저렇게조차 대처하지 못했던 못난 내가 떠올라 입맛이 썼다.   

  

 강연장으로 갈 때, 주로 지방에서 택시를 이용하는데 유난히 택시기사와의 기억이 좋지 않다. 나는 대체로 조용히 가길 희망한다. 처음 보는 사람과 말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가는 길엔 강의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 정신이 없다. 강의를 마친 후엔 쏟아낸 에너지를 추스르기 위해서 잠시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유독 내가 탄 택시 안에서는 바람과는 상관없이 달리는 토론장이길 원하는 기사분을 만나게 된다.


 원치 않는 정치 얘기를 시작으로 이미 세상에 없는 전직 대통령에 관한 얘기를 한다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인들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기도 한다. 사실 추궁에 가깝다. 정치에 관심없는 분은 주로 호구조사를 한다. 때론 나도 모르는 이유로 짜증을 낸다. 가까운 거리를 구태여 왜 택시를 탔냐며 타박하던 기사도 있었다. (초행길이니 길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어떻게든 피해 보려 이어폰을 끼고 탄 적도 있었는데 어른이 얘기하는데 대꾸도 안 한다며 버럭버럭하던 기사를 만난 적도 있었다. (나도 애는 아니다.)이러다 보니 택시 타는 일은 내 돈 들여 편히 가는 길이 아니라 기사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피곤한 고행길이 되기 일쑤다.     

 대부분은 참고 넘긴다. 그도 아니면 정중히 조용히 가겠다고 양해를 구한다. 불행이도 이도 저도 안 통할 때가 더 많다.

 “기사님, 이 주소로 가주시겠어요?”

한번은 내가 넘긴 주소를 얼핏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내비게이션에 안 나오면 내리라고 했다. 내비게이션에 검색이 안 되는 주소라니. 그럴 리가 없다 싶어 알겠다고 하고 택시에 올랐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에 없는 주소로 나왔다. 황당했지만 어쩔 수 없어 문을 열고 내리려고 다리 하나를 차 밖으로 빼고 있는데 갑자기 뭐 하는 거냐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내리라고 해서 내리는 건데 이건 또 뭐지? 하는 찰라,

“아니 내리랬다고 진짜 내리면 어떡해?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더 얘기해봤자 싸움만 될 것 같아 됐다고 하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아니 도망쳤다.     

 

 일본 교토에 본사를 둔 ‘미야코 택시’는 2017년에 ‘침묵 택시’를 운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적지를 물을 때와 계산 할 때를 제외하고 손님이 원하지 않는 한 침묵으로 운행하는 택시다. ‘침묵’이 곧 서비스인 셈이다. 더러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택시에서 대화가 없는 게 오히려 더 무섭다고 한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택시 타는 일이 두려움이 되어버린 나 같은 사람들에겐 분명 굿 뉴스였다.

 자신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반말을 하거나 원치 않는 정치 얘기로 언성을 높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집 호구조사까지 일삼는 경우를 나는 너무 많이 봐왔다. 거기에 기분 나빠하면 그냥 걱정돼서 하는 소리라는 둥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느냐는 둥 심지어 싸가지 없다는 뭇매까지 맞아야 하는 상황들은 실상 참아내기 힘들다.

 어디 택시뿐이겠는가? 주변엔 무례한 사람들 천지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훈수한답시고 사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일은 차고 넘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도대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까지 이른다.     


 나 역시 그런 일을 여러 번 겪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흔들리곤 했다. 그래, 다시 볼 사람이 아니니 그냥 넘겨도 된다. 하지만 무한 반복되는 상황에 걸려들면 하나의 징크스처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고민하게 만든다. 택시 타는 것이 두렵기까지 하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친구에게 별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고 넋두리라도 하면 돌아오는 말에 한 번 더 베인다는 것이다.

“네가 얼마나 만만해 보이면 그렇겠냐. 강하게 얘기해야지 바보처럼 참고 있었어?”

나는 무례한 사람에게 상처받은 것에 더해 만만한 바보까지 돼버렸다. 그리고 결국 나에게 두 번 때 화살을 쏘고야 만다.     

 ‘왜 매번 나는 무례한 사람들만 만날까? 내가 너무 만만한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다면 멈춰야 한다. 무례한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단순히 지나가는 감정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실어 나르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나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적어도 두 번째 화살을 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잘못은 무례한 사람에게 있는 것일 뿐 무례함을 참아낸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미 받은 상처로도 아픈데, 나에게 스스로 생채기를 낼 필요는 없다.


 이제 주변에 ‘별점 서비스’는 필수 항목이 되었다. 음식 배달에도 별점을 매기고 택시를 타도 대답을 강요하거나 무례하게 인적사항을 점검하려 들지 않는다. 별점 서비스는 어느덧 택시에서 침묵의 자유를 누리게 해주었다. 점수를 매기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례함을 방지하는 예방주사 역할을 해주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카카오 택시’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가는 곳을 문자로 입력하고, 저장된 카드로 미리 결제하니 굳이 서로 묻고 따지고 언쟁할 필요도 없어졌다. 나의 ‘침묵’에 딴지를 거는 일도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덕분에 기분 상해서 강의장에 도착하는 일도 줄었다.


 간혹 선이란 선은 죄다 넘으며 논쟁을 벌이려 하면 ‘여기는 제 구역입니다. 넘지 마세요.’라는 확실한 제스처를 한다. 욕을 하든 혀를 차든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린 각자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만난 사이일 뿐이다.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불쾌함을 주는 것이 내 잘못이 아니다. 무례하지 않지만 단호하게 내 구역으로 선을 넘었음을 상기시켜주자. 선은 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중앙선을 침범해선 안 되는 것은 잘 알면서 타인의 사적 영역을 넘나드는 사람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다. 무례한 사람에게 단호하게 대하는 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려주는 표지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