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할 용기
“제가 더 생각해 보고 내일 연락드려도 될까요?”
분명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야 했다는 걸 알지만 무 자르듯 잘라낼 수 없었다. 끈질기게 매달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대답을 미루기는 했지만 분명 거절해야 하는 강의였다.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 대비 너무도 터무니없는 강의료였다. 담당자는 소개를 받았다고 내가 적임자라며 무조건 해 달라는 식이었다. 소개받았다면 분명 강의료를 알고 있을 텐데 예산을 그리 잡은 것도 이해가 안 됐다. 적임자라면 적당한 선에서 조율하는 융통성 정도는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거절해 봤자 좋은 것 없다는 식의 태도도 기분 나빴다.
다음 날이 돼서야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하며 거절했다. 나는 뭐가 죄송했던 것일까?
유난히 거절을 못 하는 사람이 있다. 행여 거절했다가도 괜스레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냥 해야 했나?’ 불편해한다. 상대방이 불쾌해할까 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거절로 상처받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거절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다 보니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거절한 것을 오히려 미안해한다. 물론 거절로 인해 관계가 불편해지는 경우가 간혹 있기도 하다.
직장 상사의 부탁을 야멸차게 거절했다가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생각하면 쉽게 거절하기 어렵다. 부모님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불효자식이 되는 지름길이다.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거절은 실로 어렵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내키지 않아도 들어줘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거절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후배와 통화 중에 중요한 전화가 걸려왔다. 얘기를 마무리하고 끊어야 하는데 후배는 울면서 자신의 힘든 상황을 털어내는 중이었다. 전화를 끊자니 후배에게 미안하고 계속 얘기를 듣고 있자니 걸려온 전화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대답은 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작 후배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지금 후배의 전화를 끊으면 기껏 힘들게 얘기 꺼낸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며 상처받을 것이 분명해.’
과연 후배는 상처받았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내가 그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상처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한 투사일 뿐이다. 상대를 상처에 취약한 사람으로 만든 건 나 자신이었다. 실제 후배는 급한 전화가 왔으니 전화를 잠시 끊어야 한다고 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그러라고 할 수도 있다. 신경 쓰이고 걱정되면 급한 용무를 마친 후에 다시 통화해도 될 일이다.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후배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용기를 내서 꺼내어 놓으면 오히려 쉽게 문제가 해결된다. 솔직하고 정중하게 얘기해보면 된다. 후배에게 어렵게 입을 뗏다.
“얘기 끊어서 미안한데, 지금 중요한 전화가 왔거든. 통화 마치고 바로 전화할게.”
오히려 후배는 자신이 너무 오래 통화한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급한 통화를 먼저 한 후에 다시 후배와 얘기를 마무리했다. 만약 후배가 기분 나빠했거나 그 일로 다신 나를 보지 않으려 했다면 그런 인연일 뿐이라 생각하고 크게 개의치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느낄 감정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 쓰고 반응을 살피는 일은 거절로 인해 찾아오는 잠깐의 불편함보다 더 힘들다.
타인의 감정까지 책임질 의무가 우리에겐 없다. 각자 느끼는 감정은 모두 다르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구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일도 또 다른 이에겐 분노가 될 수도 혹은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안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남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상대방의 감정까지 책임지려 하는 건 어쩌면 욕심이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는 타인 지향성 사람은 거절이 힘들다.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그들의 시선을 유난히 신경 쓰고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자신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면 쉽사리 상처받는다. 자신도 모르게 도다리처럼 남 눈치 보며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쁠 이유는 없다. 그렇더라도 타인 욕구에 부응하려 정작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오히려 좋은 관계를 만들기 어려워진다.
거절은 존재에 대한 거절이 아니다. 거절당할 때 상처받는 이유는 내 존재 자체가 부정됐다 믿는 데 있다.
“내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호소했는데 그렇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지? 아마도 내가 싫은가보다. 나를 별로 안 좋게 생각하나 봐.”
우리를 거절에 민감하게 만드는 잘못된 생각이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은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몫이며 거절은 존재가 아닌 상황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거절했다고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고 거절당했다고 자학할 필요도 없다. 거절을 잘하는 사람은 오히려 거절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고, 상대와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는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거절할 용기를 갖는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모든 일을 거절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고 때론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 분명 생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고 흔쾌히 기쁜 마음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는 것이 맞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 없듯이 자신의 이익에만 집중해 도와줄 수 있는 부분까지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신만 외톨이로 살게 할 수도 있다.
그 결정의 중심이 내가 되어 과연 이것이 허락할만한 일인지 고민해본다. 되면 해주고 아니면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나와 상대를 지켜내는 길이다. 남의 눈치를 보며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일을 무리하게 수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고 그저 단순한 거절일 뿐임을 기억하면 된다. 살면서 겪어야 하는 수많은 일 중 하나인데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가며 거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당신의 에너지는 더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곳에 쓰여야 한다.
먼 길을 가기 위해선 쓸데없는 곳에 낭비되는 에너지가 없어야 멀리 갈 수 있다. 그 길 위에서 끝까지 당신과 동행할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성공의 공식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실패의 공식은 알려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하는 것이다.”
-허버트 스위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