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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ug 31. 2021

검은 양과 희생양

사랑이란 이름으로 희생을강요하지 마세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 정이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같은 지역, 같은 학교, 친한 친구에게 더 잘해주고 신경을 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내집단 편애’라고 한다. 가까운 사람이 혈연으로 묶인 가족이라면 더 말해서 무엇을 할까? 가장 가깝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뭉친 혈연관계인 가족은 그 어떤 관계보다 끈끈한 것이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나를 욕하는 건 참아도 가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와 같다.

 그래서일까? 세상 어떤 상처보다 아픈 것이 가족으로부터 받는 상처다.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은 우리 사회의 특성상 가족은 의무와 책임이라는 숙제를 안겨주기도 한다. 가족이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곤 한다.


 과연 그럴까?      

 심리 상담사 신고은의 저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업』에서는 ‘검은 양 효과’라는 말이 나온다. ‘내집단 편애’가 생존을 위한 본능인 것처럼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집단 내에 있다면 그들은 철저히 배제당한다. 마치 하얀 양들이 모여있는 무리에 검은 양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검은 양은 흰 무리 사이에서 눈에 잘 띌 것이고 그들은 천적에게 표적이 되기 쉽다. 무리에게 위험 요소인 검은 양은 배척되고 만다는 이론이다.   

  

 팔이 안으로 굽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예는 주변에 수없이 많다. 

 아버지, 어머니, 형까지 모두 의사인 소위 ‘의사 집안’ 막내인 K는 집에선 내놓은 자식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는 공부 잘하는 형과 비교당하기 일쑤였고 의사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자 부모님은 자식 취급도 하지 않았다. 부모가 어디 가서 우리 집 식구라고 얘기하지도 말라고 했다니 팔이 밖으로 굽을 일이다. 

 K는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었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야 부모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자신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오히려 편하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나름 행복해 보이지만 K가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오래도록 상흔을 남길 것이다. 

 K는 가족에게 그저 ‘검은 양’ 일뿐이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배척당하는 검은 양처럼 이름만 가족일 뿐 남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일찍부터 가족으로부터 독립해서 자신을 지켜 낸 K가 현명할 수도 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상처 받는 사람은 ‘검은 양’뿐이 아니다. 또 다른 양, 바로 ‘희생양’을 빼놓을 수 없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현은 마흔 중반이지만 결혼은 생각도 못 한다. 어쩌면 포기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지현은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5년 전부터 가족의 생계를 떠맡고 있다. 위로 오빠가 있지만, 엄마는 지현에게 경제적 책임을 지우고 있다. 오빠와 함께 살고 있고 아버지께 받은 유산도 있지만 당연하다는 듯 지현의 급여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오빠 내외가 맞벌이라는 이유로 저녁과 주말엔 지현에게 육아까지 떠맡긴다는 점이다. 지난 5년간 제대로 된 여행 한번 못하고 가족들 뒷바라지로 지현의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왜 나만 희생해야 해?”

“가족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게 무슨 희생이라고.”

 희생을 강요하거나 묵인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가족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긴다. 힘들게 떠안은 ‘희생’은 밑 빠진 독과 같다. 아무리 쏟아부어도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을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일 뿐이다.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양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생각되면 오히려 화를 낸다. 


 지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말에 친구와 약속이라도 잡는 날이면, 그럼 누가 애를 보냐며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생활비는 오빠에게도 받으라고 했다가 혼자인 네가 내야지 오빠는 돈을 모아야 할 것 아니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니 이쯤 되면 가족이라는 것이 민망할 정도다. 과연 자신이 가족의 구성원이 맞는지, 돈 벌어 오는 기계쯤으로 여기는 게 아닌지 지현의 우울감과 상처는 점점 깊어갔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더 깊고 외롭다. 벗어나고 싶지만, 자신이 희생양임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다. 가족이라 더 말을 꺼내기 어렵다. 하지만 자신이 왜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하며 과연 자신만의 인생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가족도 엄연한 타인이다. 내가 될 수 없다. 타인의 희생을 발판으로 행복해지려 하는 것은 이기심을 넘어 착취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희생 강요’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어진 삶에는 각자 짊어져야 할 몫이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대신 인생을 살아줄 수 없고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지고 살아서도 안 된다. 사랑이라는 탈을 쓰고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과는 무조건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이라도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누군가를 검은 양으로 또는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람이 가족인 경우가 많은 것은 너무나 가깝기 때문일 수 있다. 


 때론 가족이기에 희생이 필요한 순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기한 없는 희생은 아무리 예쁘게 포장해도 사랑이 될 수 없다. 가족과의 관계는 다른 만남과는 다르다. 끊어지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좀처럼 끊어지지도 않겠지만 반드시 끊어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과 인연을 끊은 것은 다르다. 혼자 잘해주고 상처 받지 않으려면 적당한 거리 두기는 필요하다.  

   

 서로를 인정하며 존중해야 하는 것은 여느 관계에서나 마찬가지다. 삶 깊숙한 영역까지 침범하는 사람과는 설령 가족이라도 막아야 하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 ‘검은 양’이 되어서도, ‘희생양’이 되어서도 안 된다.

 어느 누구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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