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되물림되지 않아야 한다.
종교: 아(我)신교 (자신만을 믿습니다)
좌우명: 내가 곧 법이다. (거스르면 바로 사망입니다)
외부평가: 세상 좋은 사람 (왜? 그것이 정말 알고 싶다)
내부평가: 슈퍼 울트라 파워 꼰대 (말해 뭘 해요)
아빠를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다. 아빠는 집밖에서만 좋은 사람이었다. 남에게만 좋은 사람. 가부장의 끝판왕을 보여주며 집안의 왕으로 군림했던 아빠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견원지간이었다.
어릴 적 말 잘 듣고 착했던 딸은 사춘기가 되면서 가부장적인 아빠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손가락 까딱하는 법이 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는 늘 불같이 화를 내셨다. 아빠 눈을 피해 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외출하다 걸리는 바람에 입고 있던 찢청(찢어진 청바지)은 아빠의 가위질에 진짜로 찢어진 청바지가 돼버렸다. 염색 얘기를 꺼냈던 남동생은 머리털 다 뽑힐 뻔한 걸 엄마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행여 말대답하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던 무섭기만 한 아빠였다. 우리 집의 모든 기준은 오로지 당신뿐이었다.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건 “딸이 당연히 해야지”란 말로 엄마의 병실을 지키라고 퇴사를 강요했던 일이었다. 엄마는 몸이 약해 자주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직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엄마 병실을 지키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당장 회사를 그만두냐고 그럴 수 없다고 하자, “그러고도 네가 딸이냐. 일이 중요하냐? 엄마가 중요하냐?”란 말로 결국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 아마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그 사람이 나의 아빠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찍소리도 못하던 나였다. 아빠가 미치도록 싫었고 그저 운도 지지리도 없게 이 집에서 태어난 불쌍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 매번 부딪히고,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알면서도 아빠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했던 건 바뀔 거라는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 역시 아빠처럼 변하게 될까 무서웠다. 미워하는 사람을 닮는다던 옛말이 실현이라도 될까 봐 죽을힘을 다해 아빠와는 다른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쳤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공격하는 대상과 스스로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나를 공격하고 싫어하는 대상을 모방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공격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유를 나를 괴롭히는 상대방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 역시 공격자의 위치가 되어 불안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타인에게 똑같이 전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말끝마다 자존심 상하게 하는 폭언을 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집에 가서 아내나 자식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폭언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은연중에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반대로 상대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다. “내가 잘못했으니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저래도 돼”라는 식의 말로 공격자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긴긴 세월 동안 아빠는 자신이 받았던 상처와 고통에 관해 얘기하곤 하셨다. 6·25 때 낳아 주신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얼마나 힘들고 아픈 세월을 보냈는지 귀가 닳도록 들었다. 어쩌면 아빠는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수용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고통스러운 감정을 외면해 오다 어느 순간 자기 존재감을 부당하게 거절당하거나 외면당했을 때 표출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당신은 자신의 행동이 자식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모를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사람의 본성은 누구나 똑같다. 내가 좋은 것은 남도 좋고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다. 내가 들어서 기분 나쁜 말이 남이 들을 때 좋을 리가 없다. 내가 당했으니 너도 당해 보라는 놀부 심보를 용납해선 안 된다.
아빠가 바뀔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저 내 안의 목소리를 꺼내야 했다. 그래야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침묵하고 있는 것은 케케묵은 감정을 묻어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감정은 묻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언젠간 곪아 터진 감정의 불순물이 어떤 형태로든 분출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상대가 바뀌지 않더라도 솔직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를 지켜내는 것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다.
적어도 내 딸에게는 똑같은 아픔을 전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아이가 같은 상처를 받길 원하지 않았다. 상처를 대물림하는 연결 고리를 끊어내야만 한다. 우리네 부모가 좀 더 지혜롭고 성숙한 부모였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내 부모도 불안전한 존재이자 미성숙한 존재임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삶을 살았던 것뿐이니 말이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은 작품뿐 아니라 삶이 끝날 때까지 지속했던 아름다운 봉사활동으로 더 사랑받는다. 그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헤어진 아버지는 나치 당원이었다고 한다. 행여 딸에게 해가 될까 두려웠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숨겼다고 전해진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오드리 헵번은 아버지를 대신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구호와 봉사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아픈 가족사로 인생의 발목을 잡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살다 갔다.
우리는 과거에 받았던 상처를 현재까지 안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 상처가 사랑하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면 무엇보다 아플 것은 분명하다. 부모가 받았던 상처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 우리는 그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또다시 당연하다는 듯 자식에게 전한다. 아마 그 윗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게 뭐 좋은 유산이라고 대물림을 하는 것일까? 지난 상처에 대해 애도하는 것까지가 우리의 일이다. 부모의 상처가 역사처럼 후대에 전해지지 않도록 이제 우리 선에서 끊어내야 한다.
나는 딸에게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어차피 받지 않기로 했으니 아빠의 상처 역시 더는 내 문제처럼 괴로워하는 일도 없다. 과거에 매몰되어 살기보다 지금의 행복을 지켜내는 데 힘을 쏟는다. 지난 상처로 힘들어하기엔 지금의 순간순간이 너무도 소중하지 않은가.
당신에게 마치 당연한 듯 바통처럼 넘겨주려는 사람이 있다면 단호하게 거절하자.
“상처는 물려받고 싶지 않아요. 저는 받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