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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Sep 10. 2021

‘불안’ 질량 보존의 법칙

고작 4%의 걱정이라니....

사하라 사막 개미는 몸체 대비 그 어떤 동물보다 둥지에서 멀리 이동한다고 한다. 참고할 만한 지형의 구분이 없는 사막에서 먼 곳으로 먹이를 찾아 이동했다가 마치 내비게이션이라도 장착한 것처럼 정확하게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이동하면서도 방향과 걸음 수까지 완벽하게 기억하는 사막 개미만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행여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방어기제가 사막 개미에게 최강의 자체 내비게이션을 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불안이란 감정은 인간에게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방어기제다.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어떤 공격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라는 심리는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와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느끼는 걱정과 불안은 수만 년 전 우리네 조상이 가졌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외부의 자극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작은 일에도 걱정하고 불안한 마음이 지속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갈 수 있고 궁금한 것이 있을 땐 컴퓨터에 단어 몇 개만 입력하면 된다. 주변의 상황은 분명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아졌지만, 우리의 불안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베트 속담처럼 끝없는 불안의 굴레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늘 불안하다.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쉬려고 떠나온 여행지에서도 휴가 후에 작성할 보고서를 생각하며 불안함을 느낀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며 불안을 현재로 끌어온다. 


 나 역시 그랬다. 걱정과 불안을 주머니 가득 넣고 다녔다. 행여 알람이 울리지 않아 늦잠을 자면 어쩌지? 중요한 순간에 노트북이 말썽이라도 부리면? 강의에 청중들의 반응이 시큰둥하진 않을지. 엄마가 유난히 일찍 갱년기가 왔다는데 나에게도 유전되지 않았을까?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불안은 극에 달했었다.


 불안은 다른 감정보다 유독 컨트롤하기 힘들다. 걱정도 팔자라더니 미리 걱정해두면 좀 대비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불안이 찾아오면 걱정도 함께 데려오곤 했다. 그 걱정이 또 다른 불안을 불러오게 되는 악순환을 겪고 나서야 그동안 지칠 대로 지친 나를 얼마나 힘들게 몰아붙였는지 알 수 있었다.     

 

 1987년 하버드대학교 사회심리학자인 다니엘 웨그너 교수는 아주 독특한 심리 실험을 했다.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A그룹에는 흰곰을 생각하라고 지시하고 B그룹은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일렀다. 같은 시간 동안 어느 그룹이 더 종을 많이 쳤을까? 아이러니하게도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B그룹이 더 종을 많이 쳤다. 특정 생각이나 욕구를 억누르려 할수록 오히려 더 떠오르게 되는데 이를 ‘백곰 효과’라고 한다. 


  걱정과 불안 역시 마찬가지다. 감정을 억제할수록 멈추기는커녕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난다. 없애려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령 한가지 불안이 없어졌다 해도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애초에 없애려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생각이다. 조바심을 내도 불안은 쉽사리 잠재울 수 없다.   

  

 어니 젤린스키의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는 걱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걱정의 4%는 우리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4%만 우리가 바꿔 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4%에 대한 일만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고작 4%라니. 

그 정도쯤이야 견딜만하지 않을까?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던 일들이 결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던 일이라는 사실에 허무하기까지 하다.      


 흔히 아이를 키우는 집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고 한다. 어질러진 장난감에 쌓여있는 육아용품은 맘먹고 대청소를 해봤자 아이의 손에 난장판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어차피 다시 찾아올 걱정과 불안도 마찬가지다. 온갖 걱정거리를 덜어낸다 해도 투자한 시간과 들인 수고와 에너지의 소모에 상관없이 금새 다른 불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조금은 멀리서 타인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애 키우는 집이 다 그런 거지 뭘 신경 써’ 하는 마음으로 불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제외하곤 한쪽으로 미뤄놓자. 그리고 너무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 고작 4%라지 않나.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삶의 속도와 방향을 유지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속도와 방향의 중심이 ‘나’여야 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쫓아가기 위한 속도면 자칫 넘어질 수 있다. 다른 이의 기준에 맞추려 방향을 바꾸면 쉽게 흔들리게 된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 사랑을 밖에서 타인의 시선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타인은 우리를 끝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늘 나보다 앞서가고, 잘났고, 능력 있는 모습은 우리를 불안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거기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그야말로 삶은 어둠뿐이다. 불안은 줄지 않고 그 질량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을 잠식시키고 만다.     


 불안이란 감정과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지만, 그 감정 역시 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힘들고 불안한 이유를 생각한다고 너무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4%에만 신경을 쓰자. 어쩔 수 없는 96%는 우선은 대기실로 보내 잠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에서 멀어진 ‘불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면서 말이다. 걱정하든 말든 여전히 아까운 시간은 흐르고 있고 바뀌는 건 별로 없다.

 불안감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매일 같은 무게의 불안을 끌어안고 불행한 삶을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신경끄기’가 최고의 편안함을 선사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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