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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Sep 12. 2021

죄책감은 개나 줘버리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

사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매번 사과하고 미안해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을 자신 탓을 하며 자신이 양보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착해빠진 사람. 


 착한 사람은 때론 지나치게 손해 보고 넘치도록 배려하고 미련하리만큼 참기만 한다. 그러고도 문제가 생기면 자신 탓을 한다. 나쁜 짓을 했을 때만 죄책감이 드는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끼고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짊어지며 살기도 한다.    

 

 지영은 그렇게 착해빠진 사람 중 하나였다. 착한 것인지 주눅 들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영의 행동은 어린 시절 겪었던 얘기를 듣고서야 이해됐다.


 지영은 삼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전형적인 유교 사상에 찌든 종갓집에서 연속해 딸 둘을 낳은 지영의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욕받이였다고 한다. 그 시집살이가 오죽했겠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지영과 지영의 언니는 조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 아들, 아들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본이요 지영을 보며 아들로 태어났어야 한다며 한탄하기 일쑤였다. 남동생을 보려면 지영이가 남자아이처럼 커야 한다며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고 늘 바지와 셔츠를 입혔다고 한다. 유치원복도 남아용으로 입혔다 하니 어린 지영이가 받았을 상처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대체 이런 미신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우습게도 말이 씨가 됐는지 몇 년 뒤 지영에게 남동생이 생겼다. 그렇다고 지영을 향한 비난이 멈추진 않았다. 이제 남동생 덕분에 다시 여자로 살게 됐으니 무조건 남동생한테 잘해야 한다고 했다. 남동생이 잘못해도 지영이 야단을 맞고 좋은 것은 무조건 동생에게 양보해야 했다. 안된 건 지영이 탓이고 잘된 건 남동생 덕이라는 요상한 논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영이 매사에 죄책감에 시달렸던 건 어릴 적 조부모가 새겨 넣은 주홍글씨 때문이었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들여다봤던 것이 바로 과거의 상처였다. 나 역시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엄마는 외모까지 이쁘장하게 생긴 남동생과 비교하며 여자애가 예쁘다는 소리 못 듣고 잘 생겼다는 소리를 듣냐며 사내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했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집에서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내가 잘돼야 동생들도 잘되는 거라는 논리도 주입 시켰다. 


 지영과 달랐던 것은, 나는 절대 인정하거나 수긍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잘못한 것이 없었다. 여자아이로 태어난 것도 맏딸로 태어난 것도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나고 동생은 동생이고 엄마는 그저 엄마의 인생이 따로 있을 뿐이다. 결국, 부모님한텐 ‘천하의 못된 년’이 됐다. 상관없다. 덕분에 누구의 마음에 드는 내가 아닌, 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게 되었고 내 딸도 어릴 때부터 말도 안 되는 논리의 잣대를 들이대며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덧씌워진 죄책감이 어른이 된다고 자연스레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상처로 남아 있고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채 오히려 자신보다 남을 걱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는 순교자의 삶을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억압되었던 자아는 ‘착한 사람’이라는 굴레에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겉모습만 어른으로 자란다. 이미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내어준 상태라 다른 자아가 있다는 사실도,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죄책감에 취약하다.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한 지도 모른 채 죄책감으로 목을 조른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죄책감은 천차만별이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부담스럽고 마음 한쪽을 무겁게 만드는 건 똑같다. 


 직장 동료가 도움을 요청했는데 때마침 집안에 행사가 있어 거절했는데 돌아오는 내내 찝찝하다. 부탁한 사람이 동료가 아닌 상사라면 조여오는 압박감은 더 심할 것이다. 갑자기 연락 온 친구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할 때 돈이 있든 없든 선뜻 내주기 힘든 게 현실이지만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친구가 어떻게라도 될까 두려워 거절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족의 일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더 어려울 것이다. 대놓고 책임을 운운하며 압박해 올 것이 뻔하다.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건 어쩌면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 내가 잘못해서 사랑받지 못하는 거라고 자기 비난을 한다. 그러니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이 무한 반복되는 죄책감의 시스템은 결국 사랑받고자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책임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래 걸리고 힘든 이유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 결국 나를 괴롭히는 사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혹은 사랑한다는 사람과 맞서는 용기가 필요해서다. 나 역시 그랬다. 비난을 각오해야 할 때도 있고 외롭고 공허한 감정의 강도 건너야 했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집안이 망한 것이 암탉의 잘못인가? 3년간 재수 없었던 게 여자가 울어서인가? 접시가 깨진 원인이 여자 셋이 모였기 때문인가? 할 수만 있다면 말도 안 되는 속담을 몽땅 갈아치우고 싶은 심정은 나만 그런 걸까?


자신에게도 질문해보자. 

지금 일어난 일이 진정 당신의 책임인지?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당위는 누가 쥐여 준 것인지?   

  

 죄책감은 상대와 진정한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과연 내면에서 말하는 ‘내 탓이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진정 당신이 원하는 것일까?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닌가? 비합리적인 책임감일 뿐이다.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책임감은 서로 책임과 의존이라는 이름만으로 이어진다. 그런 관계가 건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타인을 향한 비합리적 책임감과 기대감을 내려놓을 때,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 책임져야 할 대상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루이제 레더만은 그의 저서 『마음의 감기』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무언가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비난은 변화가 아닌 슬픔과 괴로움이다.”라고 했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죄책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정작 자신의 슬픔과 괴로움을 외면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며 괴로워한다면 당신은 어떤 위로를 해주겠는가? 왜 그 말을 자신에게 해주지 않는가?

 지금 위로가 필요한 건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죄책감은 개나 줘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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