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고 나는 나다.
어릴 적 책상에 금을 긋고 넘어오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뽀글머리 짝꿍을 윽박지른 적이 있다. 시시콜콜한 농담도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면서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픽 웃음이 나온다. 무슨 영역표시라도 하듯 짝꿍의 연필이며 지우개, 공책이 넘어오면 매정하게 금 밖으로 밀어냈다. “자꾸 넘어오지 말라니깐.” 그때마다 짝꿍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미안하다고 했는데 어린 마음에 새침 떠느라 그랬노라고 이제라도 사과하고 싶다.
선을 잘 지키지 못하는 건 오히려 어른이 되고서부터 시작된다. 동물처럼 영역표시를 하고 자신의 구역을 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관계에 있어서 선은 중요하다. 각자 내어줄 영역과 지켜야 할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친밀감은 자주 침범해선 안 될 영역에까지 발을 담그게 만든다. 서로 곤고히 연결된 관계가 되면 친밀감이라는 선물을 주지만 그와 함께 소유욕이라는 이름으로 영토 침범을 허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로 가족과 연인 사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유진이 다니는 헬스장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챌린지’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몸짱 대회가 열린다. 개인 PT를 받고 운동과 식단을 병행하면서 석 달간 가장 체지방을 많이 빼고 근육을 늘린 사람을 일등으로 선정한다. 평소 유진과 친하게 지낸 친구 딸도 참가하게 됐다. 조카 같은 아이여서 유진은 물론 모두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갓 성인이 되어 자신을 위해 운동한다고 하니 대견하고 이뻤다. 꼭 1등을 해서 이모들 맛있는 거 사주라며 농담까지 보탰다. (일등 상금이 무려 백만 원이라니 반은 진심일 수도)
며칠 뒤 함께 운동하는 유진의 친구 H도 대회에 참가한다며 당분간 자기를 위해 모임이나 회식은 피해달라고 했다. H는 여러 번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극도의 다이어트 식단으로 힘들어했던지라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비용을 냈다고 하니 유진은 그럴 수 없었다. H는 역시나 이번에도 혹독한 식단을 고집했고 유진은 걱정되는 마음에 몇 번 “다이어트라도 잘 먹어야지. 너무 안 먹으면 우리 나이엔 쓰러져.”라는 들어 먹히지 않을 충고를 했다. H는 다른 말은 필요 없으니 응원이나 해달라며 유진의 말을 잘랐다. 다이어트 기간 내내 H는 일등에 집착했다. 함께 참가한 친구의 딸을 응원이라도 하면 더 집요하게 자신에게 관심 두길 바랐다.
H는 대회 마지막 날 체성분 분석표에 원하는 숫자가 나올 때까지 몇 번을 반복적으로 체크해 결국 1등을 했다. 유진은 1등 한 건 축하할 일이지만 여러 번 잰 건 옳은 행동은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네가 친구면 나를 응원해야 하는 거 야냐? 내가 더 힘내게 옆에서 챙겨줘야지. 왜 친구면서 다른 사람을 더 챙겨? 내 친구니까 내 편을 들어줘야지. 넌 진심으로 나를 응원하지 않았지?”
“난 너를 친구로서 응원했고, 미안하지만 난 네 친구지 엄마가 아니야.”
평소 H는 친구라는 이유로 이렇게 해줘 저렇게 해줘 요구사항이 많았다.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이런저런 아픔도 겪었던 친구라 더 신경 써서 챙겨주기도 했다. 막내라 애교도 많고 욕심도 많은 걸 알긴 했지만, 무조건 자기편만 들어달라는 H의 생떼를 유진은 더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친밀감은 공교롭게도 소유욕을 가져오기도 한다. 자기만 위해 주길 바라고 무엇을 하건 자신의 속내가 어떤지 다 헤아려주길 바란다. 원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고 때론 분노하기도 한다. 강한 소유욕은 내면에 결핍된 애착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관계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와 문제가 된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인간관계에서 채우려 하고 서로가 개별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원하는 대로 따라와 주지 않으면 괴로워하고 결국 자신이 상처받은 피해자라 여긴다.
H 역시 유진에게 상처받았다고 했다. 어떻게 친구가 그럴 수 있냐고. 유진은 자신은 엄마가 아니라 친구일 뿐이라고 했지만 사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자신에게 맞춰 주길 바라는 사이는 더는 친구로 지내기도 힘들어진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무한정한 애정을 요구하고 연인이나 배우자라고 과도한 지원을 원하거나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해서는 결코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다. 설령 엄마라 해도 모든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에는 선이 필요하고 나만의 영역으로 들어와도 되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지켜야 할 선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친근함이라는 말로 변명해선 안 된다. H는 한동안 유진 때문에 상처받았다며 힘들다 했지만, 본인이 먼저 연락을 끊고 지금은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타인과는 별개인 ‘나’를 만나야 한다. 개인의 영역은 ‘나’와 ‘내면의 나’가 관계를 맺는 중요한 사적 공간이다. 허락도 없이 자신이 욕망을 충족시키려 사적 영역까지 침범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은 선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
자신의 내면 결핍은 결코 상대방을 통해 채울 수 없다. 건강한 자기 세계를 갖고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사적인 공간을 자기 구역인 양 넘나들게 만들고 결국 관계를 망치기 마련이다. 삶이 공허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다른 사람이 메꿔주길 바라지만 결핍은 타인이 채워줄 수 없다.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하고 나만을 위해서 살아주는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부모라 할지라도.
관계는 실타래 같아서 한쪽에서 아무리 풀려고 해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대가 엉킨 실타래를 풀 의지가 없으면 결국엔 잘라낼 수밖엔 없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소유욕 강한 상대는 상처는 자신이 받았다면서도 오히려 금세 잊는다.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새로운 관계를 찾느라 이미 당신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내 영역을 지켜내는 데 더 애를 써야 하는 것은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만을 바라봐 주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 너는 너일 뿐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