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에 관하여
상우가 진열대 앞에서 망부석처럼 서 있는 지도 벌써 10분이 지났다. 그는 카운터 뒤에 있는 점원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다시 진열대로 시선을 돌렸다. 진열대 위에는 두 개의 전구가 놓여 있었다. 각각 12와트와 8와트짜리, 은은한 주황빛을 내뿜는 전구였다. 상우는 4와트의 차이가 어느 정도일 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끝내 그가 내린 결론은 ‘12와트가 8와트보다는 확실히 더 밝다’ 정도였다.
상우는 전구를 잘못 구매하면 생길 일에 대해서도 상상해봤다. 그는 실망감을 안은 채, 집에서 약 15분 거리에 있는 생활용품점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미 한 번 다녀간 시간과 진열대 앞에서 고민한 시간을 모두 합치면, 전구 하나를 사기 위해 무려 1시간을 쏟게 되는 셈이었다. 경제적인 손실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작은 상상력들은 모여서 불안함이 됐고, 이건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전구 하나를 구매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기왕 사는 거, 밝은 걸로 사자!”
상우가 12와트짜리 전구를 집어들며 말했다.
결정의 순간이었다. 가게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외신들은 현장의 상황을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퀘어 앞에 모인 시민들은 환호했고, 로마 광장에 모인 카톨릭 신자들은 한목소리로 성가를 불렀다.
집으로 돌아온 상우는 책상 스탠드에 12와트 전구를 끼우고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은은한 주황색 불빛이 벽을 타고 책상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문제는, 눈이 시릴 정도로 밝았다는 것이었다. 상우는 스탠드의 고개를 이리저리 조절하며 적당한 각도와 밝기를 찾으려고 했지만, 그가 원했던 분위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오답이었다. 결국 그는 다시 생활용품점으로 돌아가 8와트 전구를 사와야만 했다. 8와트 전구는 걱정했던 것만큼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딱 원하던 밝기였다.
상우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12와트 전구를 내려다봤다. 실망감은 커졌고, 시간은 낭비됐으며, 지갑은 가벼워졌다. 그는 전구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 지를 고민했다. 쓸모는 없었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결국 그는 전구를 손이 닿지 않는 가장 맨 아래 서랍장에 넣었다. 환호하던 시민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가톨릭 신자들은 애도를 표했다.
그렇게 12와트 전구는 그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오가는 사무실에서 상우는 떨리는 눈으로 모니터 하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그가 연봉 협상과 관련한 연락을 받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그는 연봉 협상 노하우 관련 영상들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각종 팁들을 정독했다. 불경기라는 점도 감안해, 자신과 회사 모두가 만족할만한 금액도 미리 산정해뒀다. 만족스러운 금액은 아니었지만, 대의를 위해 어느 정도 양보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내심 뿌듯해했다.
그때 사내 메신저가 울렸다. 인사팀으로부터 온 메세지였다.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상우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메세지를 열어봤다.
『 상우 님의 연봉은 전년과 동일하게 유지됩니다. 성과 평가 결과에 따라 조정이 보류되었음을 안내드립니다.』
상우는 멍한 눈으로 화면을 한참 응시했다. 자신이 잘못 읽은 건 아닌가 싶어, 메신저를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결과였다. 늦은 밤까지 혼자 사무실에 남아있던 순간들. 주말마다 마무리했던 잔업들. 그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잘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열심히는 했다고 믿었는데 결국 착각이었다.
상우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상우 님!”
고개를 돌리자, 같은 부서 팀원인 용만이 서 있었다. 상우는 다급히 메신저 창을 닫았다. 하마터면 커피를 엎지를 뻔 했다.
“오늘 퇴근하고 뭐하세요?”
“어… 다른 일정은 없는데, 무슨 일이죠?”
“제가 이번에 이사를 가게 돼서요. 안 쓰는 물건들 나눔하려고 하는데 상우 님도 오실래요?”
마음 같아선 바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까. 어두운 방에 혼자 있다고 기분이 나아질 리도 없었다.
“네, 그렇게 하죠.”
“좋아요. 그럼 이따 봬요!”
퇴근 후, 상우는 다른 팀원들과 함께 용만의 집을 찾았다. 용만은 집 안을 돌아다니며 팀원들한테 가져가도 괜찮은 물건들을 하나씩 소개해주고 물건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도 함께 들려줬다. 용만의 도슨트를 들으며 팀원들은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하나씩 챙겨갔다. 상우는 맨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괜찮은 물건은 많았지만, 딱히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상우 님은 필요한 거 없으세요?”
용만이 다가와 물었다.
“네, 딱히 없네요.”
“그래도 오신 김에 뭐라도 하나 가져가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때 상우는 커튼 뒤에 살짝 가려진 스탠드를 발견했다. 깔끔한 흰색 디자인의 스탠드였다.
“아! 그것도 가져가도 돼요. 그런데 전구가 고장이 나서 따로 사셔야 할 거예요.”
“괜찮아요. 집 근처에 다이소가…”
상우는 피식 웃었다. 무언가 떠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네, 오히려 좋아요.”
집으로 돌아온 상우는 스탠드에 쌓인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는 스탠드를 침대 발치 가까이에 두고, 서랍을 열어 잊고 지냈던 12와트 전구를 꺼냈다. 전구를 스탠드에 끼운 뒤, 고정된 것을 확인하고 전원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다. 스위치에 손가락을 올리며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Let there be light.”
스위치를 누르자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이 들어오는 듯, 어두웠던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주황빛 조명이 벽을 타고 부드럽게 퍼졌고, 방 안은 오래된 안도감으로 채워졌다. 그때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12와트 전구가, 지금 이 순간엔 딱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우는 침대에 걸터앉아 은은하게 번지는 조명을 바라보며, 쓸모가 없어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먼지 쌓인 스탠드도, 서랍 속에 잊혀졌던 전구도 한때 쓸모를 잃었지만, 단지 때가 아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고.
“그래. 8와트 였으면 조금 어두웠을 거야.”
상우가 4와트의 차이를 떠올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