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런던

그는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고, 나는 그를 사장님이라 불렀다

by 지누

런던의 숙소에서 만난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니언 잭으로 뒤덮여 있었다. 비니 모자, 겉옷, 심지어 양말까지 유니언 잭이 그려지지 않은 게 없었다. 그가 덮는 이불에도 유니언 잭이 있었다. 짧은 대화를 통해 지훈은 그가 자신과 같은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남자는 그럼에도 계속해서 영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지훈이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It’s my English time.”


남자의 짧고 굵은 대답에 지훈은 이마를 탁 쳤다. 그는 남자의 태도에 진심으로 존경심을 느꼈다. 어쩌면 이게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여행자의 태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장했던 남자의 의지는 오 분도 채 넘기지 못했고, 둘은 결국 한국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지훈은 남자의 이름을 몰랐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대신에 둘은 서로를 호칭으로 불렀다. 남자는 안경을 쓴 지훈을 보고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고, 지훈은 다부진 체격의 남자를 보며 그를 사장님이라 불렀다.


사장님은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흔히 말하는 노가다꾼이었다. 그리고 그는 열렬한 뮤지컬 팬이기도 했다. 사장님은 매년 돈을 모아 1년에 한 번은 꼭 런던의 웨스트엔드를 방문해 뮤지컬을 관람한다고 했다. 국내에 있을 때도 늘 공연을 관람해, 배우들이 그의 얼굴을 기억할 정도라고 했다. 지훈은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걸 느꼈다. 그는 누구보다도 다부지고 거친 손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가장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런던에 머문 지 삼일째가 되던 날 밤, 사장님은 눈에 익은 초록색 병을 꺼내 들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지훈 앞에 흔들어 보였다.


“오다가 주웠는데… 같이 한 잔 하실래요?”

지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숙소 바닥에 앉아 유니온 잭이 그려진 유리잔에 투명한 액체를 따라 마셨다. 16도의 투명한 마법 포션이 목을 타고 몸에 들어가자, 두 남자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있었다. 첫 잔은 인천 국제공항이었고, 둘째 잔은 홍대의 포차였으며, 셋째 잔은 지훈의 자취방이었다.


“오늘은 뭘 하셨나요?”

지훈이 물었다. 그 말에 사장님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후, 사진첩에 들어갔다.

“저는 오늘 이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사진 속의 사장님은 어느 아리따운 금발 여성과 같이 술에 취해 웃고 있었다. 파티에서 알게 된 친구라고 그가 설명했다.


곧이어 사장님은 유튜브에 들어가 10분짜리 영상을 한 편 틀어 지훈한테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건 여자가 주연 배우로 출연한 단편 영화였다. 사장님은 그녀의 연기가 관객을 끌어당기는 흡입력이 있다 말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분명 조만간 헐리우드에 진출할 것 같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낮에는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고 해서, 그녀가 일하는 술집에 놀러 갔습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떨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저를 알아보더라고요.”

지훈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예쁘시네요… 여자친구분이.”

지훈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흘리자 사장님은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에이! 아닙니다! 그냥 친구예요! 친구!”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황홀했던 건지, 그의 귀는 이미 붉게 달아올랐다. 지훈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 터트렸다.


마법 포션이 바닥나자 둘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훈은 잠에 들기 전, 내일은 사장님의 이름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사장님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새벽에 짐을 정리하고 나간 것 같았다.


“술값 계산도 못했는데.”

유니언 잭이 그려진 이불을 바라보며 지훈이 나지막이 말했다.


혹여나 사장님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날 밤 그의 침대는 다른 여행객으로 채워졌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섭섭하진 않았다. 여행에서 만난 인연이란 원래 그런 법이다. 어쩌다 일정이 맞으면 잠시 함께 웃고 떠들다, 때가 되면 조용히 떠나는 것. 그게 전부였다.


지훈도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다음 여행지를 향해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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