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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웅 Jul 19. 2023

<비밀의 언덕> 완벽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단상


영화<비밀의 언덕> 네이버 포토, 스틸 컷
비밀의 언덕[The Hill of Secrets](2023)


1996년 어느 봄, 섬세하고 따스한 마음을 품은 명은이는 생기와 설렘을 가진 채 삶의 여정에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소녀다. 이 아이가 세상을 보는 반짝거리고 깊은 눈빛은 순수함으로 가득 차 눈부시게 아름답다. 또 그런 소중한 삶을 '바르게' 살아가고픈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 일까, 돈을 많이 버는 것 일까, 좋은 직장을 얻는 것 일까.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나 욕망을 가진다. 더 없이 깨끗해 보이는 명은이도 어김없이 그런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는 존재이다. 


영화는 사람의 욕망과 관계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며 우리에게 따듯하게 설득해내어 보여준다. 제각각 뿌리처럼 뻗쳐나간 명은이의 가족들을 <비밀의 언덕>에 바르고 곧게 자라도록 온정어린 토양을 덮어 단단한 나무로 길러내보인다.


영화<비밀의 언덕> 네이버 포토, 스틸 컷


명은이는 주고 싶고, 받고 싶었다.

명은의 엄마가 말하는 집의 가훈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하지만 명은이는 주고 싶고, 받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무게도 재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비슷한 것과 비교도 해보았던 선물을 명은이가 생각하는 최고로 좋은 색깔 '금색'으로 골라 집으로 가져왔음에도 마음을 바꿔 분홍색으로 다시 사 붙힐 만큼 고심해서 고른 선물을 선생님의 책상에 둔다.


김애란 선생님이 아이들의 동경과 관심의 대상인 건 명은이에게 뿐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책상 위에 같은 반 친구이자 학교의 회장인 경수가 둔 선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명은이는 질투와 실망을 느낀 것 같다. 


호감을 가지는 상대에 대한 소유욕은 필연적으로 모두를 경쟁상대를 만들게 된다. 외로운 명은이의 진심이 담긴 선물은 김애란 선생님의 눈길도 마음도 사로 잡지 못 했다. 



영화<비밀의 언덕> 네이버 포토, 스틸 컷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온남초등학교 5학년 7번 이명은. 명은이는 '비밀 우체통' 공약으로 학급반장이 된다. 학교는 작은 사회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명은이는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명은이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처럼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남들을 부리는 것을 즐기는 아이는 아니다. 등교시간 늦추기, 매점 만들기 따위의 공약을 만들어 단순히 환심을 사기 보다는 반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비밀 우체통'을 운영한다.


아마 명은이는 표면적인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정말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생일 축하를 반 아이들 모두가 함께 축하하고, 우리반의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 추억으로 남기고 소외된 친구들도 챙기는 반 아이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명은이의 꼼꼼하고 세심한 책임감이 돋보인다. 


하지만 학급반장이라는 감투도 명은이를 진정으로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 했다. 같은 반 경수의 회장이라는 직책이 더 중요해보였고, 엄마는 또 다시 잔소리를 시작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거 하는거 아니야 얼른 물어"


비밀 우체통은 이내 실망한 명은이에게 '꼼꼼한 세심함'이 아닌 '번거로운 세심함'이 되어버린다.


영화<비밀의 언덕> 네이버 포토, 스틸 컷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교내 환경보전 글짓기, 선생님의 권유로 명은이는 난생 처음 글짓기에 도전해본다. 이것이야 말로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상처받은 명은이에게 건네주는 따듯한 위로로 느껴졌을 수 있다. 명은이는 서점에서 책을 한가득 쌓고선 공부하며 성심껏 한 자 한 자 원고지에 써내려나간다.


그렇게 글 짓기에 푹 빠진 나날들을 보낸다. 인간극장을 보며 '저런 것을 왜보냐'며 예능 채널로 돌리는 아빠에 혀를 내두르기도 하고, 관계에 아직 서툰 명은이는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 엄마를 보며 '왜이리 막 살아'라며 일종의 선민의식을 내비치기도 한다. 


글은 자기가 잘 아는 것을 쓸 때 가장 잘 쓸 수 있다. 무관심이라는 병, 병에 걸린 사람처럼 어제는 선택 받고 오늘은 버림받은 서글픈 쓰레기들에 동질감을 느끼는 명은이는 또래들 보다 더 좋은 글을 지을 수 있었다. 명은이는 난생 처음 상을 받아 기뻐한다.


자신감이 붙은 명은이는 다시 열린 평화를 주제로 하는 '교내 평화 글짓기 대회'에 참가한다. 그 와중에 학교에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온다. 혜지와 하얀이, 그들은 쌍둥이 자매이다. 설레는 전학 첫 날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혜지를 명은이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새로 전학 온 쌍둥이 자매들도 이 글짓기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명은이는 무언가 비범해 보이는 이들을 경계하며 방해하기도 하며 대회를 준비한다. 시간이 지나, 대회의 시상식에서 명은이는 비로소 혜지와 하얀이가 지은 글을 듣게 된다. 


더 어릴 적 우리는 매일매일을 전쟁하며 살았다
전쟁의 이유는 부모님의 이혼과 엄마의 직업
우리는 전학을 다니며 이름도 모르는 친구들과 매일 전쟁을 했고, 매일 보이지 않는 총알을 맞았고, 매일 피를 흘렸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선생님의 중재에 따라 억지로 화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또 다시 싸울테니까
왜 꼭 억지로 통일을 해야 하는가 
대신에 우리만의 평화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꿀지 계획한다
이제부터 이 원고지에 우리만의 평화를 써보려고 한다


쌍둥이 자매 혜지와 하얀이는 항상 전학을 다닌다. 아버지가 없다. 그리고 엄마는 성매매 업소를 운영한다. 명은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매의 진심이 담긴 글이다. 


명은이는 도서관에서 책도 한가득 가져와 읽고 통일 전망대에 직접 다녀오기도 하는 노력을 했지만 '노력의 양'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 것 같다.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 보다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고 솔직하게 글을 쓰는 것의 진정한 힘을 느끼게 되었다.


그 대회에서 혜지와 하얀이는 최우수상, 명은이는 우수상을 탔다. 또 다시 명은이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영화<비밀의 언덕> 네이버 포토, 스틸 컷


손녀로부터 온 편지

명은이는 티비 속의 불쌍한 아이들을 외면하는 부모님과 가족들이 미워 집을 나와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머무른다. 그동안 참고 쌓아왔던 화가 폭팔한 것 이다.


그렇게 상처받은 명은이의 마음을 달래듯 다가와준 혜지는 이어지는 '가정의 달 기념 글짓기'를 통해서 가까워진다. 명은이가 항상 싸오는 김밥과 자매가 점심시간 마다 먹는 컵라면 처럼 그들은 빠르고 조화롭게 잘 어우러졌다.


'가정의 달 기념 글짓기'는 조금 다르다. 교내 글짓기 대회가 아닌 성원시에서 열린 큰 규모의 대회이기 때문이다. 명은이는 글을 쓰지만, '평화 글짓기 대회'에서 자매로부터 얻은 깨달음 때문일까. 선생님 모르게 솔직함을 담은 한 편의 글을 더 출품한다.


명은이는 추가로 출품한 '손녀로 부터 온 편지'라는 제목의 글을 지어 최우수상을 받게 되지만, 명은이는 최우수상을 받고 싶지 않다. 신문의 자신의 글을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손녀로부터 온 편지'

할머니도 알고 계시죠 선생님께 종종 할머니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한 사실 말이에요.

거짓말을 할 때마다 할머니께 너무 죄송스러웠어요

하지만 할머니가 없어서 거짓말을 한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 할머니라면 저를 용서해주실 것 같아, 할머니 핑계를 대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할머니, 가족은 무엇일까요? 저에게 가족은 물음표에요

세상엔 수 많은 가족들이 복이 넘쳐나는데 우리 가족만 복이 없는 것 같아요.


전 엄마에게 피가 섞이지 않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욕만 들으면서 자랐어요

하지만 외할아버지에게 장점도 많이 있어요

외할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세요

삼촌은 막노동을 하지만 저를 만나러 올때 일부러 회사에 다니는 것 처럼 멋있게 하고 와요


왜 외삼촌과 외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걸 우리 엄마 아빠는 못하는 걸까요

왜 나의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는 걸까요

전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묻고 싶었어요


명은이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 때문에 가족이 상처받을까 겁난다. 사실 명은이는 가족을 정말 사랑했던 것 이다.


영화<비밀의 언덕> 네이버 포토, 스틸 컷


완벽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경하는 선생님도 허구한날 지각을 한다. 퉁명스러운 자매도 마음 속 깊이 따스한 소망을 가지며 산다. 집안을 불평하는 오빠도 부모를 욕하는 친구와 맞서 싸운다.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외할아버지도 엄마에겐 원수같은 존재가 된다. 돈만 생각하는 엄마도 처음보는 남들에게 후한 인심을 베풀기도 한다. 그리고 바르게 살고 싶은 명은이 나 자신도 원고지에 가족들의 험담을 적어낸다.


명은이는 깨닫는다. 나부터가 너그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또 모두가 할머니 처럼 무조건적인 용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명은이는 최우수상을 수상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모두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이다. 성원시 '가정의 달 글짓기 대회' 시상식 단체사진에는 앞 사람에 가려졌지만 명은이의 미소는 밝게 빛난다.


영화<비밀의 언덕> 네이버 포토, 스틸 컷

비밀의 언덕

명은이는 뒷산 언덕에 올라가 '손녀로부터 온 편지' 위에 조심스레 흙을 덮는다.


시간이 지나 봄이 되어 새학기가 시작 된다. 

새로운 선생님의 말씀대로 네모난 표로 정형화된 가정환경조사서를 무시하곤 뒤짚어 본다. 그리곤 뒷장의 펼쳐진 백지에 나에 대해 자유롭게 써내려간다. 명은이는 이제는 안다. 나를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남들이 내려주는 상장이 아닌 나만의 진솔한 글짓기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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