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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표 Oct 22. 2023

나는 나약한 겁쟁이

들꽃(下)

문지방을 훑는 차가운 공기, 살짝 벌어진 창 틈 사이로 들려오는 술취한 취객들의 고함소리. 시간이 멈춘 듯 우리만 뺀 모든 것들이 오감을 자극했다. 그토록 바래왔던 말이었건만 막상 그녀의 입을 통해 떠나자는 말을 들으니 막상 주춤거리게 되았다. 


분명 엄마가 무르지 않게 행동하기를,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고 그동안 그렇게 바래왔지 않나. 그런데 어째서? 도대체 왜 멍청하게 머뭇거렸던 것일까?


서로 맞부딪혀 오는 이중적인 속마음에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갑작스러운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를 감싸 모아 안은 다리 사이로 몸을 숙였다. 얼굴이 빨개졌다. 당연히 이혼만이 그녀를 위한 결정이라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답하지 못한 내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나 스스로도 속이고 있던,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은밀한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 어쩌면 나 역시 그와 같은 같은 겁쟁이었을 수도. 어떻게든 못난 마음이 새지 않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답을 하려 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또래 무리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중요했다. 그랬기에 속은 곪아 썩더라도, 겉으로나마 화목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아니,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비참한 가정사따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언젠가 우리의 앞날을 위해 아빠의 외도를 눈감으며 스스로를 꺾었던 엄마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켜보는 엄마가 이런 복잡한 마음을 알아채지 못할리 없었다. 더군다나 멋모르던 어린 시절에야 이런 모순된 감정이 비롯된 까닭을 몰랐다지만, 지금은 그 감정의 형태가 아주 명확했다.


나는 아빠가 밉고, 무섭고 싫다. 그래서 엄마가 떠났으면, 행복했으면,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우리를 이루고 있는 이 가정이 깨지는 것 역시 두려웠다. 물리적인 와해, 그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덜컥 겁이 났다.


아슬아슬한 관계 속에서 한참을 지친걸까 무뎌진걸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새 이기적인 욕심은 무의식의 저편에서 파괴적으로 덩치를 불려나갔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스스로를 향한 불쾌한 감정이 속수무책으로 범람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거지? 이런 내가 질려 그 때처럼 엄마가 떠나면? 사실 들꽃을 무참히 꺾었던 건 아빠가 아니라 나였었나? 내가, 우리만 없었다면.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던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약한 웃음과 함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나의 고개를 들어올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시선을 마주쳐왔다. 뒤이어 투박하지만 다정한 손길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과 그 찰나의 침묵이 건네는 진심.


혀끝에만 맴도는 말들이 우리 둘 사이에 수놓아진 눈길을 타고 흘러 서서히 스며들었다. 이어진 길 위에 남은 자국은 흔적으로 또렷이 남아 연결된 우리의 관계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굳건할 것이며, 그 무엇으로도 끊기지 않을 사랑임을 알려주었다. 동시에 이런 시련 따위 함께라면 언젠가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을 주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라고.

너를 위해 기꺼이 이 불구덩이에 뛰어들겠다고.


들꽃은 거센 비바람에 맞서 자라나려했지만 결국 상처투성이인 제 몸을 숙여왔다. 무리하게 거스르려 하지도, 꼿꼿하게 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아래 조그맣게 자라나려는 또 다른 작은 들꽃을 거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본인 스스로를 다시 한 번 꺾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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