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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표 Oct 22. 2023

그 놈의 돈, 돈, 돈

나에 관하여(上)

띠리릭.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과 함께 이리저리 흩어졌 있던 공기가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반응했다. 곧 한 곳으로 모였다가 문이 열리는 틈을 비집고 안으로 흘러들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새끼 발가락에 물집이 생긴 검정색 구두를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에 벗어놓는다. 평소였다면 퇴근 후의 여독을 즐겁게 풀기 위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외출복을 단정히 정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후 내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통화 내용을 무심코 떠올렸다가 머리가 너무나도 지끈거려 바닥에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놓고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밤마다 함께했던 이부자리는 그간의 시간만큼 나와 동화된건지 차갑게 내려앉은 내 마음처럼 서늘했다. 에어컨을 틀은 것도 아니었는데 굉장히 차가워 황급히 이불을 들어 목부터 발까지 꽁꽁 싸매듯 덮었다.


아- 온 몸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지금 이 고요한 이 분위기가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더 이상 방해받고 싶지 않다. 푹신푹신한 촉감이 주는 이 안정감만이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피로에 절여진 몸 상태에 눈이 서서히 감기려 했다. 그러나 낮 동안 나를 한참이나 괴롭히던 휴대폰 너머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귓가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떨쳐내려 애썼지만 얼마나 지독한지 주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악몽아닌 악몽에 한참을 뒤척여야 했다.


고함을 치지는 않았지만 거의 저주에 가까웠던 비난. 차라리 악에 바친 목소리를 듣는게 낫겠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말들. 어느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하루종일 갑갑했던 가슴이 그 생각이 거짓임을 방증했다.






사실 이렇게까지 최악이 될만한 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축하받을 날이었지. 그 날은 3개월간의 인턴 생활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에 성공했던 날이었다.


마지막 관문이었던 경쟁 PT를 끝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왠일인지 엄마 이름으로 부재중이 떠있었다. 오늘 분명 아빠가 있는 날일텐데. 엄마는 아빠가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다. 괜히 연락했다가 아빠가 전화를 뺏어 나에게 이유 없이 뭐라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엄마의 연락이 의뭉스러움과 동시에 염려되었다.


다행히도 내가 거의 마지막 순서였던 탓에 발표는 금방 마무리 되었고, 전환 발표 결과 역시 빠르게 진행되었다. 3개월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에만 하루종일 매달려 있던 나였기에 최종 합격은 당연한 결과였으면서도 그 노력들이 보상받았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하고, 또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함께 합격한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던지 다들 가족들에게 저마다의 합격 소식을 알리며 화기애애하게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 아까 전의 부재중 전화가 기억나 휴대폰을 들어 급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분명히 엄마한테 통화를 걸었다. 그런데 지금 내 귓가를 때려박는 목소리는 남자였다. 동생 때문에 2년 전에 잠깐 내려간 고향에서 마주한 뒤로 지금까지 만난 적 없는 남자, 아빠의 목소리.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쌍년이 정신 나갔냐며,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안다며, 네가 입에 풀칠하고 자랄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인데 은혜를 안 갚냐고. 아무리 전화 볼륨을 최소로 낮추어도 기어코 새어나오는 큰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내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하고는 급히 비상구 계단으로 도망쳐왔다.


한때는 잠깐이나마 동생을 향했던 바래고 바랜 희미한 부성애 한 조각과 쇠약해진 그의 몸에 그도 조금은 불쌍하다라는 자기당착에 빠진 적이 있다. 정말 말 그대로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약해 빠진 나의 연민을 비웃듯이 그는 원래의 그로 금방 돌아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몸은 낡고 약해져갔지만 그의 입과 눈빛만은 더욱 표독해져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려했을 때보다도 더 위협적이었다.


하마타면 사람들 앞에서 낯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거칠게 쿵쾅거렸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꾹 막고 있던 스피커에서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거센 파동과 소음에, 심란한 마음을 제대로 진정시킬 틈도 없이 귓가에 전화기를 가져다댔다. 남들은 예쁜 말로 축하를 받고 있는데, 나는 춥고 습한 이 계단에서 온갖 욕이 섞인 질타를 받고 있다는게 참 초라하고 암울했다.


"돈이 들어왔으면 째깍째깍 부모한테 돈을 보내야지! 왜 이렇게 늦어?! 내가 굳이 전화를 해야 해?!"


아, 오늘 월급 들어오는 날이었지.

겨우 이런 것 때문에 감정 소모를 하고 있어야 한다니.


팍 식어버린 마음이 애처롭게도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빠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그 사람은 우리 가족에게 늘 돈, 돈, 돈 거렸다. 학원도 제대로 보내준 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은 다 가는 흔한 가족 소풍조차 제대로 가 본 적이 없었다. 거기까지는 집안 사정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생리 현상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구매하는 생리대와 생리통약에도 돈 낭비, 돈지랄 한다고 말도 안되는 굴욕적인 모욕감을 줄 때면 정말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조금 크고 나서는 키워준 정이 있으니 돈을 달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나보다 먼저 사회인이 된 동생이 거의 강제로 돈을 뺏겼을 때는 바보냐며, 그냥 무시하라고 버럭 화를 냈었는데... 내가 직접 겪어보니 마냥 무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라는 걸 알게되었다.


힘들게 번 돈을 어떻게든 강탈해가려는 그에게 악에 바쳐 소리를 칠 때면 그는 늘 "지금 일하는 곳에서 쫓겨나고 싶지? 한 마디만 더 해봐, 지금 당장 회사까지 쫓아가서 네 얼굴에 먹칠해줄테니까. 다시는 얼굴 못 들고 다니게 해줄게" 라는 말로 안 그래도 고달픈 인생, 끝끝내 바닥까지 끌어내리려 했다.


이런 의미없는 씨름을 이어나간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그 무엇도 없을 거라는 절망에 그저 무기력하게 두 손 두 발 다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좋아하는 돈이나 던져 주고 이런 사사로운 갈등은 피하려고 했다. 그 결과 용돈이라는 명목하에 매달 돈을 주게 되었는데, 한동안 전환 발표만을 위해 밤낮을 새가며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던 탓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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