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아름다운 남매가 우리 집에 살고 있다.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눈이 가득히 오는 겨울의 어느 날, 그리운 누나에게 눈을 한 줌 옇고 편지를 보내고 싶었던 시인 윤동주는 편지를 쓰지 못했고 흰 봉투에는 우표도 붙이지 못했다.
가족관계를 찬찬히 살펴보아도 윤동주에게 누나는 없다. 그렇다면 1941년에 쓴 <편지>라는 시 속의 누나는 누구일까?
혹자는 윤동주 출생 당시 연이어 요절했다는 손 위 누나 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고 혹자는 어린 시절 추억을 함께 한 동네 누나로 일제 동원령에 의해 이국의 땅으로 끌려간 ‘여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누나’가 누구이든 간에 달리 해석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서사(敍事)는 애틋하다 못해 절절한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다.
눈 오는 아름다운 순간에 함께 있고 싶고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더더욱 보고 싶어 지는 ‘간절한 그리움’ 말이다.
‘누나’라는 이름은 특히 남동생에게 있어서는 따스한 사랑의 언어이며 한편 애틋하고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아닐까? 포근한 어머니 품이 되기도 하고, 다정한 연인의 말이 되기도 하는......
그래서 이 시를 읽던 고등학교 시절 어느 겨울밤,
‘나에게도 남동생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첫눈처럼 편지가 왔다.
오늘, 우리 집에 시인 윤동주는 아니지만 윤동주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닌 남자, 사람, 동생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돼 왔다.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누나 ㅇㅇㅇ에게’라고 쓰여 있다.
편지 보낸 사람은 나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이고, 남편에게는 ‘하나뿐’인 3대 독자이며 누나에게도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다.
우리 집 가족 구성원 모두는 ‘하나뿐’이라는 수식어가 붙기에 개별적이고 독자적이며 유일하고 귀하다.
그런데 참으로 난데없고 뜬금없지 아니한가?
사랑해, 덕분이야, 칭찬해 따위의 오글거리는 멘트는 이미 엿 바꿔 먹은 지 오래고 어, 아니, 왜?, 뭐?, 됐어요, 싫어, 안 가, 필요 없어... 이런 부정적 언어 구사에 관한 한 달인인 중2 남자아이가 편지를 썼다니 말이다.
서류봉투에는 2020 긍정언어 프로젝트, <가족사랑 엽서 공모전> ‘따뜻한 우체통’이라 쓰여 있었다.
공모전이라고? 해괴망측도 분수가 있어야지.
‘나도 하지 못하는 공모전 입상이라도 했다는 뜻일까?’ 의문이 일었다.
등기로 온 봉투를 들고 앞 뒤를 돌려가며 어리둥절하는 와중에 마침 전화가 왔다. 놀라 쓰러지지 마시라고 타이밍도 적절하시다. 프로젝트 담당 사회 복지사로부터의 전화였다.
“아드님 편지가 도착할 텐데요... 누나에게 쓴 편지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네, 방금 받았는데 이게 뭔가 하고 있었답니다”
“누나에 대한 마음이 너무 기특하고 애틋하더군요.
요즘 이런 거 표현하는 남자 친구들도 드물지만 진심이 그대로 전해졌어요. 우수작으로 선정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우애가 너무 좋은가 봐요. 칭찬 많이 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저보다 누나를 더 잘 따르고 좋아하죠. 누나도 누나도 이런 착한 누나가 없고요. 무슨 말을 썼을까 정말 궁금하네요...”
현실이라 믿기 힘든 이 사건은 사실이었다.
수신인이 내가 아니니 당사자인 딸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궁금함이 극에 달했지만 참아보기로 했다.
‘궁금하다, 궁금해’
아들이 수학학원에 간 사이 딸이 편지를 들고 나왔다.
“아, 놔, 이 눔의 짜슥이, 이렇게 감동을 주네”
“정말, 어쩜, 이렇게 구구절절 예쁜 말만 썼니? 우리 딸이 훌륭하니까 동생도 보고 배우는 거지. 존경한다는 말은 쉽게 나오는 말도 아니지만 듣기도 힘든 말이란다. 훌륭하다, 우리 딸, 아들! 멋있다. 엄마가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 고마워.”
생각나는 대로 칭찬 일색의 말을 융단 폭격하듯 쏟아내었지만 모두가 적절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더 좋고 멋진 말이 있을 텐데......
말은, 언어는 생각을 뛰어넘지 못할 때가 많다.
마음이 뜨겁게 뜨겁게 차올랐다.
누가 시킨다고 될 일은 아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한 적도 없다. 우애 있게 지내라, 서로 아껴주고 칭찬해줘라, 응원해줘라 말은 하였지만 마음이 그리 쓰이는 것까지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려서부터 남매는 싸우는 일이 적었다. 일방적으로 살뜰히 챙기는 누나 덕이었다.
“우리 애기, 이거 가지고 놀래?” 하며 동생을 먼저 챙겼다. 다른 집은 싸우는 꼴이 보기 싫어 아예 장난감을 두 개씩 산다는데, ‘내 사전에도 그런 일은 없다’지만 그 생각을 알았음인지,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음인지 티격태격하다가도 빠른 합의 하에 조용해지곤 했다.
사춘기가 되어서는 언성이 높아질 일이 늘기는 했다. 대부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때문에 일어난다.
말이 짧다거나 은어를 사용한다든가 약간의 욕설이 동반된다거나 하는 것인데 무심코 틱틱 내뱉다 보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기분 상하게 되고 되받는 말 역시 억세고 거칠 수밖에.
나는 ‘좀 심한데...’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남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거친 말들도 그 세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대치 내지는 냉전 상태가 되어서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라면 먹을 건데, 하나 더 끓여?”
“누나, 이 문제 어떻게 풀어?”
무심히 툭 한마디 하면 화해하자는 신호다.
언제 우리가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였던가 하면서 시치미를 뗀다.
자기 할 일을 미루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고 항상 꾸준한 걸음으로 본분을 지키려 노력하는 딸.
그 모습을 보고 배우며 마음을 다잡고 정진하는 아들. 받은 격려를 응원으로 화답하는 의젓함이라니.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이다. 서로를 향한 격려와 응원으로 이어져야 더욱 아름다워지는 남매 사이다.
아이들로부터 부모가 배운다더니 그 말이 맞다. 배움에 끝이 없는 이유일 것이다.
첫눈이 오기로 이보다 기쁠까?
눈 덮인 세상이 아름답기로 이보다 더할까?
아름답고 아름다운 남매가 우리 집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