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녀석, 잠시 졸았겠다' 죽비가 날아들었다.
계절이 바뀔 무렵이면 사람들은 봄 탄다, 가을 탄다 라는 말을 하곤 한다.
상대적으로 여름 탄다, 겨울 탄다 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유독 봄이나 가을이 올 때 이런 얘기들을 하는 걸 보면 이 무렵, 신체적으로나 심적으로 달라지는 것들이 분명 있으며 그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입춘과 경칩이 되면 저절로 동면에서 깨어나는 동물들처럼, 백로와 한로(寒露)를 지나며 잎을 버리고 두꺼운 껍질로 동면을 준비하는 나무들처럼.
소위 '계절 탄다'라는 말에 딱히 그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 계절이 바뀐다고 특별한 감정 변화 따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은데 희한하게도 올해는 좀 달랐다.
평범하지 않은 COVID-19 상황의 한 해를 보내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따뜻했다 추웠다를 반복했던 몇 주 전부터 계절 타는 게 이런 건가? 생각되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으슬으슬 한기가 오고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뿌둥하고 의욕이 없고 마음 한 편이 근질근질한 느낌. 물을 잔뜩 먹은 빨래처럼 축 쳐져 있었다.
차라리 이런 날은 밖으로 나가 할 일에 몰두하는 것이 최선인데... 마침 학교에서 개학 전 교복을 판매하는 날을 정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년 12월에 졸업생들의 교복을 수거해 드라이클리닝을 해서 깨끗이 전시해 놓았었는데 상황이 좋지 않아 판매를 미루고 있었다. 학부모들의 문의를 받다 보니 마음이 급해져서 서둘러 전 학년 학부모 대상으로 web발신을 돌려 교복 판매 날짜와 시간을 잡은 것.
시기상 조금 늦은 판매라 사람들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판매와 정리, 올해 일정에 대한 계획을 얘기하며 의지를 세우고 나니 다시 몸과 마음은 살아나는 듯해서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블로그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브런치에 글 쓰는 일도, 글 읽는 일도 대체로 소홀한 요즘이라 덮으려 했는데, 음... 블로그라면 활동을 접은 지 10년은 더 되었는데 메시지라니 의아한 마음에 확인을 했다.
무려 18년 전, 일간지에 실린 내 글을 읽고 스크랩해서 파일에 꽂아 놓았었는데 우연히 블로그에 들어와 다시 글을 읽고 옛 생각이 났노라는 내용이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당시 신혼이었는데 나의 글로 인해 즐겁게 집안일을 할 수 있었다고.
<짜증 다림질, 기쁨 다림질>
남편은 눈을 뜨면 화장실로 직행해서는 그곳에서 남은 잠을 떨어내고 거울을 보며 하루를 열심히 살아낼 준비를 한다. 그 시간에 나는 다림질로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이 입고 나갈 와이셔츠를 다리는 것이다.
매일매일 와이셔츠 다리는 일이 귀찮지 않으냐고, 한꺼번에 다려 놓으면 훨씬 편할 거라고 남편은 가끔 한마디 한다. 나 역시 결혼 초에는 일주일치를 한꺼번에 다려 놓았었다. 다림질이 서툴렀던 탓도 있지만, 아침식사 준비에 바빠 다림질할 시간을 매일 내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통 낮 시간을 이용해 다렸는데, 와이셔츠 하나에 보통 20분 정도, 일주일치를 한꺼번에 다리자면 두세 시간은 족히 걸렸다.
여름에는 다리미의 열로 인해 엄청 더울 뿐 아니라 한 시간 정도가 지나면 '내가 이런 시시한 일을 하고 있다니…' 하는 자괴감이 절로 들어 짜증 나기 일쑤였다. 나 역시 결혼 전 직장생활을 오래 했지만 내 손으로 옷을 다린 적은 정말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웬만하면 모두 세탁소에 맡겼던 것이다.
그러니 남편이 입고 다닐 옷을 준비하면서도 고운 마음이 들지 않았고, 다림질도 예쁘게 될 리가 없었다. 대충 하자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빠듯하게 살림하는 주부 입장에서 세탁소에 맡길 수만은 없었다. 다림질을 할 때마다 내 마음이 자꾸자꾸 미워지고 있었고, 미운 마음은 집안 청소를 할 때도, 빨래를 할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매일 아침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남편이 입고 나갈 옷을 정갈하게 준비해 줘야지'하고 말이다. 생각을 바꾸니 변화가 확실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림질을 하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됐다. 어제 못다 한 얘기부터 오늘 할 일들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으로 빌기도 한다. 내가 정성스레 다려 준 이 옷을 입고 남편이 상쾌하게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기를. 깔끔하게 다려진 이 옷처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흐트러짐이 없기를. 실업률이 증가하는 요즘, 아내가 준비한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를. 출근길에 사각대는 와이셔츠 깃의 감촉을 느낄 때마다 아내의 사랑을 한번 더 느껴주기를.
좋은 생각들로 아침을 열게 되니 자연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내가 다림질로 여는 아침이 어쩌면 수도생활을 하는 스님의 '죽비 깎는 아침'의 숙연함과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중앙일보 2003년 09월 05일 [W4면]
죽비 깎는 아침과도 같았던 '다림질하던' 새댁은 세월이 흘러 '다림질 안 하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토록 경건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던 다림질이었다니, 새댁의 곱고 착했던 마음이 봄 햇빛을 타고 바람에 실려 내 마음에 훅~하고 꽂혔다.
사람은 초심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다 했거늘, 그 초심은 지금 남편에게로 넘어갔다. 남편이 다림질을 한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하기 싫은 것이 청소며 빨래고 밥이며 다림질이다. 특히 다림질은 가끔 잊어서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세탁소에 와이셔츠 하나 990원씩 일괄 맡기기 시작했는데, 알뜰 남편이 허투루 돈을 쓸 수 없다 하여 손수 다리게 되었는데 거의 10년째 한결같이 와이셔츠를 주말에 몰아 다리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건대 18년 전 글을 다시 보며 댓글을 달아주신 그분이 알게 된다면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노곤하게 늘어져서 봄을 타네 어쩌네 심술을 부리던 마음에 화라락 불이 이는 것 같았다.
'요 녀석, 잠시 졸았겠다!'
어깨 위로 죽비가 날아드는 것 같아 화다닥 정신을 차렸다.
글은 이렇게 살아 18년 후, 지금의 나를 다시 깨운것이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정성과 진심을 다해야 할 것이며 타인을 위한 마음쓰기에 온기와 사랑을 담아야 할 것이다.
오늘 쓴 글이 다시 살아나 나를 또 꾸짖을지 모르니 ‘열심히 살아야겠다’ 마음을 굳건히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