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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Apr 02. 2021

5분 대기조와 팔랑귀

신뢰하고 있다, 쓸모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당신이 부르시면 어디든 달려가겠어요.”
- 이 소리도 아닙니다.
“아야, 나 불렀냐? 머 땀시 자꼬 불러 쌌냐?”
- 이 소리도 아닙니다.
“나? 불렀어? 지금 바로 나갈게.’
- 바로, 이 소리입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광고 카피처럼, 말은 하였으되 토를 달지 않는 조용함입니다. 바람처럼 행해지나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축지법 쓰는 도인의 걸음입니다.

  

# 내 별명은 ‘5분 대기조’


   나는 누군가로부터 “지금 모해요?”라는 유혹의 말을 들으면, 왜?라고 되묻지 못한다. 글쎄... 라며 간을 보고나 튕기지도 못한다. 할 일이 있긴 한데... 라며 뜸을 들이지도 않는다.

특별히 바쁜 일이 아니라면 밥 먹던 숟가락을 던지고서라도 질문에 성실히 응할 뿐 아니라 버선발로 달려 나간다. 준비하고 나가기까지 긴 시간도 필요치 않다. 단 5분이면 된다.

가글하고 껌 씹고 옷 갈아입고 지갑 챙기고 나가면서 눈곱 떼고... 그래서 붙여진 내 별명이 '5분 대기조'다.


  처음 이 일을 겪으면 상대방은 몹시 당황한다.

 "5분 후요? 그게 가능해요?... 저... 지금 가고 있는 중이에요. 20분은 걸려요..."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사는 동네를 지나거나, 이 근처 볼 일이 있어 왔다가 문득 생각나면 바로 코 앞에서 전화를 한다. 나의 현재 상태는 아랑곳없이 다짜고짜 한마디 한다.

 "내려오세요, 앞이에요..."

 "뭐라고?"

내가 파놓은 구덩이에 내가 빠진 꼴이다.


5분 대기조...실제상황이 발생하면 5분 이내 작전지역으로 출동 가능토록 즉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예비편성작전


  5분 대기조라는 별명, 싫지는 않다. 내가 자처해 얻은 별명이니 오히려 영광이라 해야 하나? 영광 뿐인 상처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이렇게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상대방이 나를 찾았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정말 우연히 지나가다가 문득 생각이 났을 수도 있고, 심심하고 할 일도 없는데 '아무나 걸려라'하는 심정으로 전화기를 돌렸는데 마침 내가 걸려들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 전화를 한 사람이 곤란한 처지에 있거나 부탁을 할 일이 있거나 마음이 울적하거나 혼자 있기 쓸쓸하고 말할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때는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도움이 못 될 수도, 위로가 안될 수도 있지만 '모모'처럼 말은 잘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  5분 대기조의 변(辨) : 자주 봐야 더 보고 싶고, 이야기할 것도 많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대부분 나를 불러내는 이유는 별게 없는 것 같다.

정말 우연히, 그냥 생각이 나서, 심심해서, 부르면 항상 나와주니까, 커피 밥 술 가리지 않고 잘 먹어주니까... 이 정도 일 것이다.

내 마음 같아서는 ‘즐겁고 재미있으니까’와 ‘배울 게 많으니까’를 추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그러나 아니어도 할 수 없다. ‘그냥 생각이 나서’라는 말 한마디라도 어디냐?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대통령 다음으로 바쁜 사람’ ‘전국구’ ‘국민 엄마’ 라 불리곤 하는 친정 엄마는 자신의 인기 비결을 ‘사월 초파일 빨’이라 우겼다.

음력 사월 초파일(부처님 오신 날) 생신 날, TV에 나오는 절집 풍경을 보며 항상 이렇게 얘기하셨다.

 "저 봐라, 전 국민의 50% 이상이 내 생일을 축하한다고 등을 달고 절을 하고 난리도 아니잖니? 이 놈의 인기는...”


  그러나 친정 엄마의 인기 비결은 따로 있었다.

 "누가 나를 불러주거든 귀찮다 생각 말고 기쁜 마음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도 또 불러 주지. 싫다, 싫다,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니? 사람은 자주 만나 이야기해야, 보고 싶기도 하고 할 말도 많은 거란다."


  나는 이 말을 새겨 지키는데 꽤나 진심이다. '너무 진심이라 뭘 이렇게까지 할 게 뭐람?' 싶을 때가 있기는 하다. 특히 남편이 나를 불러줄 때이다.

 "뭐하슈? 밥 안 먹었지? 나 지금 집으로 가요. 같이 외식이나 합시다."

허걱,,, 지금 막 밥숟가락을 놓은 상태다. 목에서는 구수한 트림이 꾸욱~하고 나올 지경이다.

 "약속 있는 거 아니었어?"

 "일이 생겨서 취소됐어. 설마 밥 먹은 거 아니지?..."

 "당연 아니지, 뭐 사줄 건데?"

 "뭐 먹을 게 있나? 수육에 소주나 한 잔 할까? 일단 간다..."

 "어이... 알았어요..."

망했다. 밥에다가 술에다가 오늘도 저녁을 두 번 먹게 생긴 거다. 혹시 배라도 좀 들어갈까 나는 급하게 팔 벌려 뛰기를 한다.

하나둘셋, 하나!... 둘둘셋, 둘!... 셋둘셋 셋!...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지?




# 팔랑귀의 변(辨) : 함께 하고 싶다는 쓸모와 쌓이는 신뢰 마일리지


  "모해요?"에 미혹(迷惑)되어 부름에 5분 만에 달려 나가는 것은 비단 이 뿐만은 아니다.

'모해요? 지금 나올 수 있어요?'라는 의미도 있지만 가끔은 '시간 괜찮으면 나와 취미생활을 함께 할래요?'로 확장되기도 하고 '나랑 여행 같이 갈래요?'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래서 소위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찝쩍대며 배운 것들이 많다. 캘리그래피, 드립 커피, 기타, 태보(태권도와 복싱), 플라잉 요가, 줌바, 스트레칭, 코바늘 뜨기, 프랑스 자수, 골프... 등등.

새로이 배우게 되는 것은 언제나 신기하고 흥미가 당기는 일이어서 처음에는 눈을 반짝이며 열심인데 그게 오래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

그중, 가끔 생활 속에서의 변주를 꾀하고자 써먹기도 하는 것이 있지만 배움을 꾸준히 유지하거나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심사숙고해서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배웠어야 했는데, 상대방의 달콤한 말에 팔랑귀를 쫑긋 세웠던 탓이다.


  그러나 이 또한 변명의 여지는 있다.


  배움을 계속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요, 함께 취미를 같이하자, 여행 같이 가자 했던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었다는 것이 둘이다.

 “네 말대로 한번 해보자, 가보자!”

사람을 믿는다는 것에는 신뢰가 바탕이 되는 것이기에 현금이 오가지 않아도 신뢰 마일리지가 쌓이는 법이다. 게다가 함께 할 수 있는 기쁨은 덤이 아닌가.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은 또한 아직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그렇다고 무조건 좋아 좋아, 아무렴... 을 외치는 ‘핫바지’의 경지에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영화 <타짜>에서 아귀가 고니에게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라고 말하는 장면에 나오는 그 핫바지 말이다.


  핫바지처럼 말에 휘둘려 돈을 빌려줬다가 못 받은 경우는 몇 번 있지만 아직 작정하고 덤비는 ‘사기’는 당해본 적은 없으니까,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혜안은 있으니까.

  

  5분 대기조, 팔랑귀라고 불리지만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에 의미를 듬뿍 담아 괜찮은 별명이라 생각하고 산다. 그래서 아직도 가끔 지금 모해요? 같이 배울래요? 콧바람 쐬러 갑시다 소리를 듣고 산다.

‘함께 하니까 너무 좋아요, 보고 싶어요, 믿으니까...’로 자의적 해석을 하며, 만나면 ‘유쾌하고 배울 점이 많아요’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며...


  혹시라도,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소리는 절대 하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표지사진 : 드립커피 수업. 캘리 책갈피, 꽃 브로치, 옷 리폼, 머리끈... 등등. 내가 만들어서 입기도 하고 주위에 선물을 주기도 한 것들...


*) 빙다리 핫바지 : ‘빙다리’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이지만 병신이라는 말을 낮춰 부르는 표현이며 본래 "-다리"는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 늙다리

핫바지는 어리석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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