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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Apr 22. 2021

숲이 깊어지려나 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빠르게 대처하기

#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안다.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안다. 산을 오르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산 정상에 닿아있다는 것을. 힘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으며 정상을 향해 산을 오르는 이유이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어느 산악인의 말도 있지만*) 어쩌다 큰 맘먹고 산에 오르는 나 같은 무늬만 등산객에게는 ‘산 정상에서 느끼는 희열 때문에 산에 오른다’라는 소박한 표현이 보다 현실적이다.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왕 산에 오르기로 한 이상 정상까지는 찍고 내려와야 체면이 서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꾸역꾸역 올라간다.

 ‘사람이, 여자가 가오(폼. form)가 있지’ 하면서.

덕분에 인공호흡기가 필요할 정도로 숨이 턱에 차고, 딱! 이 자리에서 죽을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려도 올라가야 한다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생각을 하며 길을 재촉한다.

 ‘올라가야 끝이 나지...’ 하면서.

그렇다고 ‘전방주시’ 경고문구 보듯 앞만 보고 가지는 않는다. 가끔은 주위의 나무와 숲을 살피며도 간다. 바위 아래 산꽃이 예쁘게도 피었네, 눈인사도 건네며 오른다. 소싯적에 날다람쥐처럼 산 좀 타고 다닌 경험의 소산(所産)이다.


  산 정상에 마침내 올라 뚝뚝 떨어지는 땀을 바람에 말리며 넋을 놓고 한참을 서 있어보면 안다.

헉헉대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드는 어느 순간,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편안함과 나른함.

내 몸 안에서 세차게 돌던 붉은 피가 맑은 이슬처럼 투명해진 것 같은 착각.

내 머릿속에서 추근대며 맴돌던 많은 생각들이 자취를 감춰버린 듯한 고요와 적막.

그 느낌 후라야, 비로소 산 아래의 풍경들이 하나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 좋다. 아, 시원해...”


  산 정상에서는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다.

하늘 아래 오롯이 나를 느끼고 정상에 우뚝 선 나를 느끼고 산 아래의 문명과 떨어진 자연 속의 나를 느낀다. 하늘과 햇살과 바람에 나를 맡기면 나는 한껏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산을 올라온 시간에 비하면 정상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다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수월하다.

‘내려가서 파전에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마셔야지.’

생각만 해도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산을 오를 때는 언덕과 바위, 봉우리와 능선을 넘으며 ‘이게 끝일 거야, 더 이상의 고행은 없겠지’ 싶을 때면 어김없이 다시 오르막이 나타나 후회와 다짐을 번갈아 하게 되고 한 발 한 발이 천근만근인데 내려갈 때는 봉우리도 능선도 롤러코스트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힘이 들 때는 그냥 힘든 것만 생각된다.

그러나 내 마음이 편온하고 행복하면 감사도, 기쁨도 느끼게 되는 인생의 이치와 닮았다. 다 비우고 내려오는 산행의 마지막은 그래서 가벼운 것인가 보다.


인생을 흔히 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는 이유이다.




# 산을 안 올라본 사람은 모른다.

 

  여기, 산을 열심히 오르고 있는 한 아이가 있다. 야트막한 산은 소풍 삼아 올라본 적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처음인 아이다.


  초짜 치고는 제법 계획을 야무지게 세워 서두르지 않고 페이스를 조절해 가며 걷는다. 산을 오르기 전, 산의 높이와 지형지물, 땅의 상태, 날씨, 자신의 건강체크까지 꼼꼼히 따져 구간별 타임 체크를 해 놓았기에 이변이 없다면 완벽한 등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이라 그런지, 오랜 등산 시간 때문인지, 작은 돌멩이와 울퉁불퉁한  땅, 꺾여 쓰러진 나무 같은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히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주위에 눈을 돌리지도, 소리에 귀를 열지도 않은 채 앞만 보고 가는 모습이 왠지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아이는 산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산을 오를수록 힘은 들고 피로가 엄습해 왔지만 얼굴을 찡그리거나 인상도 쓰지 않았다. 아이는 항상 웃음 띈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산행을 즐기고 있구나’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겉으로는 약해 보여도 강단이 있는 아이다.


  산을 오른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산의 80%쯤을 올라왔을까? 90%쯤을 올라왔을까? 그야말로 고지가 바로 코 앞이다.

그런데 갑자기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쿵쾅쿵쾅 들리는 것 같아 화들짝 놀란다. 너무 심하게 뛰어 심장이 터져버리거나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무섭고 두렵다.

한 발 조차 내딛을 수 없는 상태가 찾아오기도 해서 그 자리에 멈추어 있거나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머리도 아프고 속이 메슥거리는 것도 같다.


 ‘길을 재촉해야 하는데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인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뭐가 잘못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치밀하게 등산계획을 잡고 꾸준히 올라왔는데, 여기서 무너지고 쓰러지면 안 되는데... 왜 이러지? 왜?...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나는 정말 안 되는 걸까?

가슴이 옥죄어 오는 듯한 두려움과 공포, 아픔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 산을 오르던 등산객 서너 명이 한결같이 혀를 끌끌 차며 지나간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땐데, 정상이 바로 앞인데, 어쩌려고 그러니? 그러고 있으면 안 돼, 빨리 일어나서 걸어야지, 빨리!”

 “에고고, 산을 오르면서 힘든 줄 몰랐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어야지. 요즘 애들은 끈기도 없고, 아주 나약해 빠졌다니까.”

 “올라갈 자신이 없으니까 아프다고 핑계나 대고... 정신머리 하곤... 쟤는 안 되겠다, 안됐네, 쯧쯧쯧...”


  아이는 그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어른들의 모습에 상처를 받고도 손을 내밀어 힘겹게 도움을 요청했다.

 “참고 다스리며 정상까지 가야 한다는 거 알아요. 어떻게 해서든 올라는 갈 거예요. 포기하지는 않을 거예요. 근데요, 그냥 아파요, 힘들어요, 죽을 것 같이 두렵고 무섭고 불안해요. 안 아플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주시겠어요? 힘든 인생의 순간들을 지나오셨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좀 알려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혼자 남겨졌고 혼자 일어나 터벅터벅 걷다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했고 혼자 아팠고 혼자 무서웠고 혼자 울었다.




#  드디어, 숲이 깊어지려나 보다.


  그때, 만약 산을 오르던 그 등산객들이 아이에게,

 “여기까지 올라온다고 많이 힘들었지? 산을 몇 번을 오르내린 우리도 힘든데, 처음인 너는 얼마나 힘들었겠니? 당연한 거란다. 혼자 그러고 있으면 위험하니까 다시 올라갈 힘이 생길 때까지 옆에 같이 앉아 있어 줄게.”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여기는 앉아서 쉬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구나. 저쪽으로 가면 아름다운 숲이 나오는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자연의 소리를 듣노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평화로워질 거야. 숲에서 우리 좀 쉬었다 갈까? 쉼도 필요한 법이란다.”라고 말해주었다면,

아이가 느끼는 고통의 시간은 짧아졌을까?

가슴이 이유 없이 쿵쾅거리는 증상은 없어졌을까?

좀 더 일찍 훌훌 털고 일어나 마지막 남은 산길을 기분 좋게 오르고 있을까?


  아쉽게도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고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고 난 후에야 어리석은 나는 깨달았다.

그 미욱한 등산객이 나였고 혼자 힘든 시간을 참고 견딘 것이 내 딸이다.


  인정하기 싫었던 시간, 부정했던 시간에

 ‘내 아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왜?라는 이유를 물었던 시간, 고민했던 시간에

 ‘나의 잘못 때문일까?’ 자책을 했다.

해결점을 찾아야 할 시간, 치료를 받아야 할 시간에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망설였다.

내가 부정했고 이유를 물으며 고민하고 망설였을 시간 동안 아이는 얼마나 오랜 시간 아프고 무섭고 고통스러웠을까?


  딸과 함께 정신건강의학과 문을 열고 들어가 상담을 받고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받아 들고 나왔다.

 “배가 아프면 소화제를 먹고, 머리가 아프면 진통제를 먹듯이 마음이 아프면 거기에 맞는 약을 먹는 거야, 걱정하지 마.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괜찮아. 심장이 쿵쾅대면 참지 말고 도움을 요청해,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숨쉬기에 집중해. 그리고 잠시 쉬어. 잠을 자도 좋고. 네가 편할 때까지... 그래도 돼.”


  3주가 지났다.

딸은 많이 편해진 것 같다. 학교에서 조퇴하지 않고도 잘 견디고 있다. 시시덕거리며 더 많은 시간 이야기하며 지내고 있다. 그나마 빨리 대처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고 힘든 순간은 앞으로도 갑작스럽게 찾아와 나를 당황하게 할 수도 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빨리 대처하는 것.

절실히 깨닫게 된 교훈이다. 어른으로서 빨리 마음을 바꾸어야 아이도 바뀔 수 있다.


  이 어렵고 힘든 과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의 끈을 놓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며 정진하고 있는 딸아이를 보며 한편, 생각한다. 대견하고 또 대단하구나. 딸의 모습에서 울창한 숲을 본다.


  “숲이 깊어지려나 보다”

 






*)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 1886~1924. 영국 산악인)

1923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왜 에베레스트를 오르려고 하느냐?(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라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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