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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Feb 17. 2022

홍게 30마리가 사라졌다:홍게대첩

여운은 오래 남아

  조금 전까지 내 눈앞에 있던 것들이 없어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도 아니고 홀연히 떠난 것도 아니고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없어졌다. 분명 있었는데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어이없어할 이유는 없다. 이것들의 선명한 붉은 갑옷은 유물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찢기고 뜯기고 잘리고 씹힌 채.


  없어진 것은 불과 일주일 전까지 동해 바다, 정확히 말하면 NLL(northern limit line, 북방한계선)과 울릉도 근처의 심해에서 수압에 견디기 위해 체내에 많은 바닷물을 머금고 자유로이 10족 보행을 하며 산보를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속초항에서 출발한 어선에 의해 포획돼 온몸에 구멍이 뚫려 바닷물을 쏟아내고 커다란 찜통 속에서 쪄졌을 것이다. 그렇게 크지 않은 녀석들이니 속초 앞바다로 겅중겅중 마실 나왔다가 어망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제목 : 홍게

엄마 말 안 듣고 겅중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몸이 뚫리고 바닷물이 역류할 때
그제야 알았지
태양빛이 따스하기로
엄마 품만 같지 못하단 것을,
바다가 고향인 것을,
순희 라도 와락 안아볼 것을.

아, 이럴 줄 몰랐네
정말 몰랐네


  '녀석들'이라고 부른 데는 이유가 있다. 예전에는 가격도 싸고 개체수가 많아 대게에 밀려 '꿩 대신 닭'처럼 싸구려 취급을 당했지만 성장 속도가 느리고 번식 효율이 좋지 않아 매년 어획량이 감소하여 급기야 대게처럼 어획 금지 기준이 법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제는 결코 값싼 녀석이 아닌 몸값 좀 하는 부류로 격상되었지만 암컷은 연중 포획이 불가능하기에 수컷들만 죽어나가게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른 나이에 요절할 줄 알았다면 수컷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며 땅을 치고 후회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뒤집어졌어요!' 홍게를 판매하는 판매자의 카페에 소개된 글만 보아도 홍게를 구매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도 남았다. 속초항에 들어온 배에서 내려지자마자 곧바로 쪄진 따끈따끈한 홍게라니. 택배로 받아볼 수 있는 양은 홍게 30마리, 가격은 8만 원대였다. 바다가 뒤집힐 일이 아니라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홍게 1마리에 1~2만 원 정도가 내 머릿속에 저장된 홍게의 적정 가격이었다. 물론 크기는 작았다. 그러나 충분히 달달한 살을 발라먹을 만한 사이즈였다. 아이들이 어렸다면 일일이 살을 발라줘야 하기 때문에 여러 마리보다 가장 큰 사이즈 한 두 마리를 샀을 것이지만 다리와 몸통을 대충 잘라주거나 혹은 통째로 한 마리를 쥐어주어도 알아서 발라 먹을 나이가 된 만큼 사이즈는 중요하지 않았다. 질 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게 맞다.


  속초항에 가면 같은 가격으로 60마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문구에 잠깐 미혹되어 '이참에 속초로 떠나? 말어?' 잠시 고민했지만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속초로 출발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편하게 집에서 30마리를 받는 것으로 선택했다.


  택배 상자를 여는 순간,

 "와~~~" 탄성과 함께 인증샷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붉은 바다가 식탁 위에 펼쳐지고 있는 생생한 현장이라니...

볼품없이 작을 거란 생각은 한순간 날아갔다. 꽤 괜찮은 사이즈였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오늘 제대로 전쟁 한번 치를 만했다. 전의(戰意)가 불타올랐다. 손장갑 끼고, 가위 들고 앞 쟁반 챙겨놓고, 돌격 앞으로!!!


4인분의 밥이 모두 게딱지 비빔밥으로 만들어졌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한 번만 게딱지 위에 올려 먹었고 그 후로는 양푼째.


  오랜만에 불뚝 솟아난 전의는 활활 타올랐고 그 험난한 고지를 1시간 여만에 점령하고 말았다. 사력을 다한 전투였다. 1시간 동안 홍게만 뜯어먹은 것이라면 '전투'로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딱지에 흥건히 고인 살과 내장, 육수를 박박 긁어모으고 생김을 잘게 잘라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만을 첨가한 '홍게 게딱지 비빔밥'도 해 먹고  발라먹기 귀찮은 작은 다리를 넣어 '홍게 라면'도 끓여 먹었다. 소위 할 건 다 했으니 전투 부문에 있어 기술 점수, 예술 점수를 합쳐 99.9의 확실한 대상감이 아닐 수 다.


  산화(散花) 한 것은 우리 가족의 의지만은 아니었다. 홍게도 장렬히 전사했던 것이다. 제 몸 내어주고 붉은 갑옷만 덩그러니 남긴 채. 그래서였을까. 비릿한 바다내음과 달큼한 홍게살의 내음이 온 집안을 점령하고 있었다. 손에도 그릇에서도 식탁에서도 홍게의 살 냄새가 진동했다. 코 끝에, 입 안에 홍게 향의 여운이 쉬이 없어지지 않고 오래 남았다.


좀 작은듯 해도 충분히 먹을만한 사이즈(좌), 뜯기고 잘리고 씹힌, 홍게의 갑옷들(우)

  입 안도 얼얼하다. 입천장 어디쯤은 보일 듯 말 듯 생채기가 났을 것이다. 혀도 알싸하긴 마찬가지. 예민해진 돌기 사이 어딘가에 게 국물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뭔가 해낸 느낌, 뭐든 해낼 것 같은 느낌이 퍼진다.


  처럼 벌인 홍게 대첩으로 축 처진 삶의 현장에서 전투력이 급상승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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