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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Mar 16. 2022

나는, 때로, 스마트폰이 공포스럽다

말하기의 감수성에 대해

 "얘야, 길 건널 때는 스마트폰 하지 마라, 위험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걷는 학생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예 한소리를 하고 만다. 그냥 지나쳐도 무방하련만 봐 넘겨지지 않는다. 분명 아이는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것일 테다. 아차, 정신을 차리고 머쓱하게 웃으며 서둘러 뛰어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힐긋 쳐다보는 얼굴에 '이 아줌마 뭐야!' 짜증이 섞여 있는 아이도 있고 노골적으로 "아이씨!" 혹은 "뭐야?"를 내뱉고 가는 아이도 있다. 그러면 나는, 거친 말을 내뱉고 가는 아이를 쫓아가 나쁜 말을 한 것과 올바르지 못한 행동에 대해 지적하고 혼을 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니?"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 모습을 본 딸과 아들이 "그러다 진짜 나쁜 아이들 만나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그냥 놔두세요." 간곡히 얘기하기에 이제는 쫓아가서까지 쓴소리는 하지 않지만 어른으로서 한마디 타이르는 말은 거둘 수가 없다. 


  분명 한 눈을 팔고 걸으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무언가에 부딪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할 텐데 그놈의 스마트폰이 뭐라고 저렇게 위험한 보행을 할까 싶다. 또한, 저토록 아이의 혼을 빼놓는 콘텐츠는 무엇일까, 애정 어린 어른의 타이름을 어째서 짜증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궁금함은 남는다.


  비단, 길을 걸을 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커피숍이나 음식점에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다를 바 없다. 같은 장소에 앉아 있으나 그들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다. 낙엽만 굴러도 깔깔대는 사춘기 여고생,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은 구석기시대의 뗀돌멩이처럼 박물관에 보존된 사어가 됐다. 핸드폰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건 아이들의 유연하고 기민한 손뿐이다.

 "만나서 얘기도 안 하고 스마트폰만 할 거면서 너희들은 왜 만나자고 한 거니? 집에서 톡 하는 거랑 뭐가 달라?"

손인사로 안부를 묻고 차를 주문하고는 스마트폰 삼매에 빠진 딸과 친구들을 보며 언젠가 한 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러게요, 자기들도 어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집에서 톡 하는 것과 만나서 톡 하는 거랑 엄청나게 다르다는 걸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거예요?, 어이없어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은 킥킥댔다.

세상에, 만나서 톡으로 대화를 하는 아이들이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현대의 문명과 문화이다.


  그들은 왜 대화 속에서 서로의 감정을 읽고 시선의 깊이를 느끼고 콘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기호로 그것을 대신하려 하는 것일까. 말을 할 때보다 자판을 두드리며 하는 대화에 많은 언어를 담지 못하고 감정과 표현을 풍부하게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스마트폰 언어는 계속 짧아지고 있는 중인데도 말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을 들여다 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은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코로나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방구석 스마트폰 만남은 자리를 잡았다. 이뿐인가. 버스나 지하철, 공원이나 공간 내에 있는 사람들 역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손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고 움직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이 12~59세 스마트폰 이용자 4,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2013년 자료로, 거의 10년 전 자료가 이토록 놀랍다면 현재는 어떨까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기 위해 자료로 씀), 응답자 중 77.4%가 '특별한 이유 없이도 수시로 스마트폰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노모포비아, “no-mobile phobia(전화 없는 공포증)”의 증상이다. 

'스마트폰이 없거나 찾지 못하면 불안감을 느낀다(35.2%)', '자기 전이나 잠에서 깨자마자 스마트폰부터 확인한다(53.9%), '친구나 가족과 있을 때도 스마트폰만 계속 이용한 적이 있다(35.2%)'. 

지나친 스마트폰 사용은 노모포비아 증후군 외에도

거북목 증후군, 목 디스크, 손목터널 증후군, 손가락 관절염, 안구건조증 등을 유발할 수 있고 어린이나 청소년의 경우,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행동장애 등이 나타날 수도 있다. ‘노모포비아’가 심해져 ‘몽유 문자병’ (Sleep Texting), 즉 잠을 자면서도 스마트폰에 대한 강박 때문에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일어나서는 기억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진동소리나 벨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유령 진동 증후군'도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공포를 느낀다고까지 얘기하는 요즘의 아이들과 어른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스마트폰이 공포스럽다.


  나는 하루에도 최소 서너 차례 나의 스마트폰이 눈에 지 않는다고 분실신고를 한다. "내 스마트폰이 어디 있지? 내 스마트폰 본 사람?~"을 외친다.

내가 내 스마트폰을 찾는 이유는 스마트폰을 어딘가에 놔둔 채 한동안 사용을 안 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내 스마트폰이 존재를 알리는 알람을 모두 꺼놓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화가 왔을 때 진동모드로 해놓은 것 말고는 모든 소리를 꺼놓았다. 그러니 내 스마트폰이 어디에 있는지 전화를 했을 때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확인해야 할 일이 생기거나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해야 할 때 내 옆에 그것이 없으면 집 여기저기를 뒤져야 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옷 주머니, 가방 등을 이 잡듯 뒤질 때도 있다. 머릿속 기억은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닮아 퍼드덕거린다. 하루에 겨우 몇 번 확인하는 스마트폰을 열었을 때면 나는 몇십 개 혹은 백 개가 넘는 각종 톡과 부재중 전화, 메시지 등과 마주하게 된다. 스마트폰을 열었을 때 내 볼 일만 보고 대충 덮었다면 톡은 그다음 날 확인하게 되는 만행으로 이어진다. 남편도 "제발 톡 확인하고 전화 좀 받으소" 라며 답답해 한다.


  이 만행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행된다.

전화는 꼭 필요할 때, 급할 때 한다. 톡이나 메시지를 보고 촌각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면 즉답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소위 '읽씹' 하는 경우인데, 확인했을 때는 대화가 이미 끝난터라 댓 달기가 애매하여 한 번 보자는 말만 남겨놓는 일이 많다). 보고 싶다거나 만나야 할 이유가 있으면 약속을 잡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한다. 불필요한 톡이나 알림이 너무 많아 신경 쓰기 귀찮을 때가 많다. 스마트폰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요즘 사람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느리다. 한 번 스마트폰을 잡으면 다양한 루트로의 이동이 용이해 사용 시간이 늘어날 소지가 다분하다... 등등


  이런 이유로, 가족이나 사람들과의 대화중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집안일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업무 중 사적인 통화는 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아이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 식사시간, 대화중에는 스마트폰을 금했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말하기'에 있다. '말하기에 대한 감수성' 같은 것이다. 사람과의 말하기에는 많은 행동과 생각이 얽혀 있다. 말을 하면서 그 사람의 호흡의 깊이를 느끼고 말과 말 사이의 여백을 즐긴다. 대화라는 것은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내면의 깊이를 끌어내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물론 SNS상의 말들과 대화도 만나서 하는 대화와 다를 바 없다고 한편 생각은 한다. SNS상의 만남과 관계의 유지도 일상이 되었고 지역과 공간을 좁힌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 상황으로 수업이나 회의, 업무 등을 비대면으로 진행하였고 나 역시 많은 상황을 스마트폰 하나로 해결하고 있다. 구글링을 비롯 쇼핑, 은행업무, 선물하기, 설문, 공지사항 전달하기, 사진 찍기, 메일, 안내사항 확인 ... 편리한 구석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스마트폰이 두렵고 공포스럽다. 귀찮고 싫다고 도외시했던 나의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해 무관심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람과 대화에 관심이 많으며 대화하고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단지 나는 스마트폰에서의 대화가 말보다는 기호에 가깝다고 여전히 느낀다는 것이다. 한번 뇌리에 꽂힌 생각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나이 탓이라고 어깃장을 놓는다.

하여, '사랑을 그대 품 안에...'처럼 '스마트폰을 내 손에...' 착 붙이고 살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일취월장의 변화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스마트폰이 때로는 나의 귀차니즘에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98년 한 통신사의 광고 카피가 더 좋은 이유는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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