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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Feb 28. 2022

가족 모두 확진이라니...

이제 아프지 말자

  열이 펄펄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딱 한 번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그랬다. 포도 통조림이 먹고 싶어서였다. 고작 깐포도 통조림이야? 하겠지만 어렸을 적에는 조리되고 가공된 과일 통조림은 소위 '있는 집'에서나 먹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봄에는 딸기 여름에는 수박이나 복숭아 가을에는 사과와 배, 감을 먹고 겨울에는 귤을 먹는다는 일반적인 공식만이 인정되고 성립했다. 그러나 여지가 없어 보이는 확고한 규칙에도 약간의 예외, 틈새, 열외, 별칙 같은 것이 가끔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니까 그 예외의 일-계절과 관계없이 포도나 복숭아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국민학교 2학년 때 알았다. '스메'라 불리던 통조림을 동네 가게에서 사 먹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직접 사 먹어보지 못했기에 '도대체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그날은 경상도 무용대회 본선이 있는 날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한 무용 연습이 어린 나이에 힘에 부쳐서였을지, 타고나기를 허약하여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전날부터 기침을 하며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당일 버스길에서는 멀미인지 열감 때문인지 토를 해댔고 대회장에 도착해서도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대회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탈진해 버린 나는 차례가 될 때까지 엄마 무릎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입천장 깊숙한 곳이 벌겋다 못해 시커멓기까지 했다나 어쨌다나.


 "대회 수상이고 뭣이건 간에 축 처진 몸부터 추슬러야 춤을 추든, 집으로 다시 가든 하겠다 싶었지." 

엄마는  맘을 먹고 인근 슈퍼에서 깐포도와 복숭아 통조림을 사 왔다고 했다. 통조림 국물부터 조금씩 입에 흘려 넣어 었는데 심봉사 눈 듯 번쩍 더니 언제 아팠냐 싶게 벌떡 일어나 깐포도 통조림 하나를 후루룩후루룩 마시더란다. 그리고는 차례가 되어 무대 위로 올라가 펄펄 날아다니며 춤을 췄다 했다.

 '저것이 혼자 저럴리는 없고 신이 들렸나' 싶었단다.

 "춤꾼으로 살았다면 이름 꾀나 알리고 살았을 텐데..."

엄마는 내가 결혼한 후에도 몇 번을 그 얘기를 하신기한 듯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던?"



  그 후로, 열이 펄펄 끓어오를 때면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렇게 묻곤 하셨다.

 "먹고 싶은 게 있어? 깐포도 통조림 사줄까?"

그 순간이 예외가 성립되는 절호의 찬스임을 나는 귀신 같이 알아챘고 엄마 속도 모르고 집안 형편도 생각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네... 깐포도 통조림이 먹고 싶어요." 


  그래서 아프지 않은 날이 오래 이어지면 '열이 펄펄 났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했었다. 철없는 시절이었다.




  "하여튼 허구한 날 아팠으니까. 맨날 업고 다녔지. 잔병치레가 잦아 온전하게 살 수는 있을까 싶었어..."

엄마의 얘기를 빌자면, 어렸을 때 나는 엄청 약골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팠던 기억이 별로 없다. 결핵을 앓아 죽다 살아났다는 것도 들어서 아는 이야기였다. 무용대회 날도 심하게 아팠다고 하지만 잠깐 열이 있었나 싶었고 깐포도의 달달하고 상큼한 맛에 정신을 차리고 무대 위에서 춤을 춘 기억밖에 없다. 무대 아래 돌아와서 픽 쓰러졌다고 하는 것도 내 기억에는 없는 얘기다.


  약골로 지냈던 어린 시절 이후, 중학생 무렵부터 나는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큰 병 한 번 앓지 않았고 수술이라든가, 입원이라든가, 거운 태양 아래를 걷다 쓰러지는 따위의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쯤은, 일주일 만이라도 병원에 입원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심하게 아프지 않고 살짝만 아픈 정도로. 그러면 무위도식하며 주위 사람들의 적당한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 기회는 좀체 오지 않았고 손발이 고생을 해야 먹고 살 팔자려니 하며 신세 한탄을 했더랬다.


  그나마 하늘이 도왔음인지, 저러다 죽겠다 싶어 불쌍히 여겼음인지 절실히 휴식을 원했던 육아 절정기에 입원을 두 번 하게 었다. 바라던 대로 일주일씩이었던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한 번은 상대방 100% 과실에 의한 고속도로에서의 교통사고로, 또 한 번은 퇴행성 디스크로.


  그런데 살다 보니, 아파보니, 겪어보니, 힘들어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쉰다'는 개념이 충전이나 휴식과 연결되기보다 아프거나 지쳐서 눕고 쓰러진다로 인식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옛날처럼 열이 펄펄 났으면 좋겠다라든가, 꾀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더는 하지 않는다. 특히 병원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철이 들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철이 안 든 미성숙한 어른 아이였다.




  그런데 누군가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게 분명하리라. 

결단코 원한 없는 강제 휴식이 얼결에 일주일 주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민 전체가 한 번씩은 걸려야 끝이 날 거라고 우려하는 그 오미크론 확진이었다. 일주일마다 확진자 수가 배가 되는 더블링 현상이 계속되는 추이가 심상치 않더니 올 게 온 것이다. 증세는 아주 경미했다. 약간의 기침과 가래, 인후통 정도였기에 이참에 좀 쉬어야겠다는 오만방자한 생각을 했더랬다. 감히.


  그러나, 오 마이 갓!

반전은 숨어 있었고 사건은 중첩되었으며 내리막길에는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었다. 이틀 지나 딸이, 또 하루 지나 아들이 그리고 하루 지나 남편이 차례로 확진이 되고 보니 쉬는 게 아니라 집안이 전쟁통이 돼 버렸다. 나는 환자 행세를 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졸지에 야전사령관이 되어 몇 날 며칠을 꼬박 새우기에 이르렀다. 세 사람 모두 열이 있고 목이 찢어질 듯 아프다 하니 꿀물에 냉수건을 챙겨 들고 식사와 약을 챙기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슈퍼 전파자'가 되어 버린 꼴이니 몸으로라도 때워 벌충을 해야 했다. 


  특히 남편의 증상이 심했다. 침을 삼키지 못할 정도로 목 통증이 심했고 해열제를 교차 복용해도 열은 38도 39도를 넘나들었다. 인근 병원은 입원할 수도 없었고 보건소와의 통화는 쉽지 않았다. 연결 후에도 여러 단계의 확인이 필요했고 결국 그 밤에 구급차는 오지 못했다. 응급 환자들이 너무 많아 차량이 없다고 했다. 나 역시 확진자라 병원까지 태워다 줄 수도 없었다. 그럼 119라도 부를까?

 "고열로 의식이 없거나 호흡이 곤란할 정도가 아니면 119도 출동하지 않을 겁니다..."

 '아, 이러다가 골든 타임을 놓치고 기다리다 혹은 이동하다 죽는 거겠구나.'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조건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혼이 빠질 듯 정신없는 상황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일에만 집중하고 급하게 닥친 일부터 해결해 나가면 된다. 잡다한 생각은 금물이다. 시간이 해결을 도울 것이다.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이제 고비는 넘겼다. 오늘부터 나는 격리 해제이고 곧이어 여자 2호, 남자 2호, 남자 1호 순으로 격리는 해제될 것이다. 그러나 호흡기 증상, 두통, 무기력증 같은 후유증이 2주 정도 이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후각과 미각도 돌아오지 않았다. 실제로 식구들 모두는 몸에 힘이 없어 각자의 침대에 누워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가족 모두 확진이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깐포도 통조림 따위 안 먹어도 되고, 일주일 만이라도 조용히 쉬고 싶다는 생각 따위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 제발 더 이상 아프지 말자.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이런 말은 꺼내지도 말자. 아프면 그냥 아픈 거다, 손해다. 그러니 절대 아프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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