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운 Jun 03. 2022

헐렁하게 만 오이김치 김밥

오이김치 오징어채가 빛을 발한 주말 아침 김밥

  일주일에 밥을 한 번만 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이제껏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하루 한 번 밥하기는 가능해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니요. 식구가 넷인데 어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작년 이맘때쯤이었을 겁니다. 집안 살림에 열심이고 싶지 않아서, 정말 하기 싫어서,

 "나는 지금부터 하루 한 번만 설거지할 거니까 사용할 그릇이 없으면 먹을 사람이 씻어서 먹도록!" 하고 집에 폭탄 하나를 살포시 던졌습니다. 20년 넘게 무수리로 살았는데 이런 배짱부려볼 만도 하잖아요. 크게 동요하지 않더군요.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곤 설거지를 하루에  두 번, 세 번씩이나 했던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 같았습니다. 속으로 '어디 한 번 맛 좀 봐라' 키들댔습니다.


  그럼 그렇지. 며칠이 지나면서 불평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하더군요. 싱크대에 그릇들이 쌓여있으니 오며 가며 보이는 것이 아름답지 않았을 겁니다. 가끔은 물 마실 컵도 없고 라면 끓일 냄비도 없었겠지요. 그렇다고 설거지를 하기는 귀찮고 말고요.

 "정말 하루에 한 번만 설거지할 거야?" 여기저기서 야단이 났습니다. 저라고 그리 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좀 버텨보기로 했지요. 이제 아이들도 자기가 먹은 그릇쯤은 설거지하고도 남을  나이거든요. 엄마를 도울 줄도 알아야지요. 한창 공부할 때이긴 해도 공부하는 게 유셉니까? 24시간 공부만 하나요? 공부만 잘하면 뭐합니까? 사람이 돼야죠. 타인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고 솔선하고 배려하고 돕기도 해야지요.


  뭔가 달라질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남자 1,2호 여자 2호  모두 징하게 버티더라고요. 한두 번 설거지하는 척하더니 보고도 못 본 척 내버려 둔 채 대충 라면을 끓여 먹든가 사 먹기도 하더군요. 대치국면이 이어졌어요. 굳히기, 버티고개에서 버티기... 뭐 그런 거지요.


  그러다 의외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성격 급한 사람이 지는 거랬지요.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요. 급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도 하잖아요. 보다 보다 참다 참다 남편이 식기세척기를 주문했더라고요. 이사 오기 전에는 식기세척기가 빌트인 돼 있어 잘 사용했는데 지금 사는 곳에는 인테리어 하면서 설치하지 못했죠. 오래된 아파트라 주방 공간이 넓지 않았거든요. 그거였어요! 설거지가 더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이유 말이에요. 이게 웬 떡이랍니까. 어쭙잖게 스트라이크 일으켰다 항복받아낸 기분이랄까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제 속도 모르고

 "남편 잘 만난 줄 아쇼. 이런 남편이 어디 있다고. 당신 생각하는 건 나 밖에 없는 줄이나 아쇼..." 남편은 큰소리에 기고만장이었습니다. 맘껏 그러라고 그냥 놔두었습니다. 혹시 압니까? 어깨 으쓱 한 김에 내쳐 다른 것도 사줄지 모르잖아요. 삶의 질이 달라졌으면 되는 겁니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죠. 중이 고기 맛을 알아버렸으니 이를 어쩝니까. 이번에는 일주일에 밥 한번 하기를 시도해 볼까 생각이 된 겁니다. 그렇다고 전혀 엉뚱한 이야기만은 아니었어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일이 아닌 것이 어쩌다 밥을 한 게 어떨 때는 밥통에서 72시간도 있고 그 이상도 있을 때가 있더라고요. 뚜껑을 열면 밥이 누런 거, 아시잖아요.


  첫째가 대학생이 되고 둘째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부터 생긴 변화입니다. 집에 밥 먹을 사람이 없는 겁니다. 남편과 저는 출근을 하니 집에서 저녁만 먹으면 되고 대학생 새내기는 자유를 구가하는 중이라 아침에 학교 간답시고 나가면 밤이 돼야 잠을 자러 들어옵니다. 남편과 저는 술로 끈끈히 다져온 사이라 저녁 밥상보다는 주안상을 선호하다 보니 굳이 저녁밥 먹을 일이 없는 거지요. 혹시 밥을 먹게 되는 경우를 대비해 한 번  밥 할 때 여유 있게 해서 1인분씩 냉동시켜 놓으면 그만이고요. 남편이 점심 도시락을 안 싸가니 가능한 얘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주일에 밥 한 번 하기가 가능하게 된 지 3개월이 되었네요.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제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요. 그렇다고 주방일을 전혀 안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주말에 몰아서 하지요. 일주일치 반찬과 먹을거리를 금요일에 준비합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삼시 세 끼를 원칙으로 하니까요. 가족과 함께 고기 굽고 음식 만들어 먹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기도 하고요.


오이김치가 시큼하게 잘 익었고 오징어채 밑반찬도 있어요. 김밥재료로 그만이지요.


  아침은 비교적 간단한 음식을 준비합니다. 일주일 동안 지내온 생활이 다르니 주말 아침 기상 시간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기에 한 그릇 뚝딱 차려먹기 좋은 것으로 준비하지요. 시리얼이나 토스트는 준비품목에서 제외시킵니다. 어렸을 때부터 줘본 적이 별로 없어요. 아침이 든든해야 하루가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밥'이어야 하지요. 단연 김밥이 최선입니다. 우리 집 김밥은 거창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무지와 우엉, 계란지단만 있으면 있는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면 되니까요. 참치마요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가 되고 김치나 오징어채, 멸치가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맥주 안주로 데쳐 놓은 소시지도 무심히 잘라 놓으면 훌륭한 속재료가 됩니다.


  칼로 재료를 자르는 손은 과감하거나 단호할 필요가 없고 다듬는 손은 하나하나 섬세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찬이 필요하지도 않고 담는 그릇이 다양하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쉽게 버려지는 재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몇 줄 말아 놓으면 먹기도 쉽지요. 자르기마저 귀찮으면 한 줄 손에 들고 가래떡 먹듯, 핫도그 먹듯 한 입 한 입 베어 먹으면 됩니다. 잘라진 김밥 한 조각보다 많은 양을 베어 먹으면 입 안에서 재료들이 폭죽처럼 작렬하지요. 파티 타임이 별건가요. 이게 바로 파티 타임인 거지요. 아삭아삭 오이김치 씹히는 소리가 경쾌하고 맛도 상큼합니다.


  오이김치와 오징어채가 빛을 발한 주말 아침 김밥입니다. 애써 꾸미지 않아도 되고 힘든 가사노동에서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린, 여유 있는 아침이에요. 굳이 힘들일 필요가 없지요. 신경 쓰고 챙기고 꼼꼼히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최선을 다하되 항상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20%쯤 남겨둔 여력은 예기치 않은 변수의 상황에서 빛을 발할 테니 말이지요. 헐렁한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있는 재료로 헐렁하게 만 김밥이지만 꼬다리는 야무지게 챙겨야지요^^



이전 07화 이 참에 쉬어 가자, 접는 김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