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한 점 지나가지 않는 날, 먼 산을 바라보면 산은 정좌한 스님의 뒷모습을 닮았다. 흐트러짐 없이 말끔하고 고요하다. 한참을 바라보면 시간이 내려앉아 조으는 듯 나른하고 좀체 흔들릴 일 없다는 듯 묵직하다. 그러다 머릿속이 멍해지면 이내 시선을 거둔다. 멈춰있는 것에 오래 시선을 두는 것은 때론 지루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산과 내면의 깊은 교감을 나누고 대화하지 않는 한, 산은 그냥 산이다. 흔들림 없이 언제나 그곳에 있어줄 거라는 믿음과 확신은 주지만 보면 볼수록 새로워지는 매력은 없다. 시선을 둘 뿐이다. 시선의 끝에는 편안함이 놓인다.
학창 시절,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머얼건 운동장을 바라보던 그 시선이다.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매번 물어왔지만 깊은 생각을 한 적은 거의 없다. 단지 텅 빈 운동장에 나를 내려놓았을 뿐이다. 마음 안에 떠도는 생각들을 풀어놓고 자유로이 돌아다니도록 놔두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며 벙그는 듯 웃고 있는 나를, 내가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체이탈(遺體離脫), 그래서 나는 혼이 나간 듯 오래 창가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고독을 즐기는 방법이었다. 시선의 끝에는 한숨이 남았지만.
가끔 바람이 불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불어대는 바람, 봄바람. 바람은 머무르지 않고 쉼 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변덕꾸러기 아이의 모습을 닮았다. 편온하고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새로움이 있다. 나무를 흔들고 꽃잎을 떨구고 꽃가루를 옮기고 구름을 흩어지게 한다. 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와 헤집어 놓고 내 마음을 훔쳐 이리저리로 도망 다닌다. 바람의 변전(變轉)을 누가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이 어디에서 비롯하여 어디로 정거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온도차, 대기의 밀도차, 그로 인한 기압차, 자연 및 조형물의 마찰이 생기면서 발원하여 생기를 불어 일으킨다. 무채색의 빛깔을 무지개 색깔로, 무생물처럼 미동 없이 멈추어 있던 것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꽃기린의 텅 빈 마음은 그래서 흔들렸을 것이다. 부침 없는 삶, 죽음의 문턱을 맛 본 순간, 변화하는 쪽으로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세상 밖으로 다시 한번 나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아마도 다시 태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태어나지 않고 움트지 않으면 성장도 없고 바랄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1년을 넘게 자라온 꽃기린은 끝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쑥쑥 자라던 호야에게 응애인지 깍지벌레가 생긴 것이 겨울 초입이었다. 퍼지고 늘어져서 분갈이까지 해줬는데 춥다고 통풍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인지, 과습인지 이유는 분명치 않다. 옆에 있던 꽃기린에게 옮겨간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증상이 같았기 때문이다. 끈적하고 허연 것이 메마른 가지, 가시 사이 생겨나더니 잎이 마르고 떨어져 하나도 남김없이 민둥민둥해졌다. 겨우내 일어난 일이다. 호야 화분 세 개는 모두 뽑아버렸는데 왠지 꽃기린은 뽑아내지 못했다. 한 가닥 희망이라는 끈을 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미동도 없고 바이탈 사인도 보내주지 않았지만 그냥 놔두기로 생각되었던 건 그게 끝내 살아지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민둥민둥 하던 꽃기린 가지 마다 잎이 달리고 꽃이 계속 피어난다. 겨드랑이에서도 잎이 난다. 신기하고 신비롭다.
행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봄이 되면서 꽃기린을 베란다 밖에 내놓았다. 내 손은 떠났으나 자연의 생명력은 가끔 놀라운 기적을 행하기도 하니까. 또 행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혹 물을 주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 같은 것이었달까. 살아날 기미는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버티고 이겨서 살아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끝이라 단정해버리기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컸다.
그날도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창 밖의 나무들이 휘청거리고 먼지가, 꽃잎이 흩날렸다. 그러다 문득 내버려진 꽃기린 화분에 시선이 멈추었다. 화마가 할퀴고 간 민둥산에 듬성듬성 풀이 자라나듯 희미한 초록빛이 바람에 번져 보인 것이다. 꽃기린이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은 일도 일어나긴 하는구나, 그때 느꼈다. 싹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벌거숭이 모습에서는 어디 하나 생명의 빛이라곤 찾을 수 없었는데 싹이 나다니... 놀라웠다.
바람이 전하는 메시지였다. 영화 <제5 원소>에서 불, 공기, 물, 흙 그리고 에테르, 즉 사랑이라는 제5 원소를 확인했던 것처럼. 도공(陶工)이 흙, 물, 나무, 불, 공기에다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을 갈아 넣듯. 식물에게는 흙과 물과 햇빛과 공기도 중요하지만 화룡점정, 서로를 통하게 하는 바람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리라. 서로 통해야 하는 것이다. 통하려면 유연해야 한다. 멈추어 있어도 안된다. 서로의 마음을 흔들고 가능성을 깨우고 변수에 모험을 거는 것.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 바람에게서 서로를 통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변화를 이끄는 힘을 배운다. 그러니까 우리는 꽃기린처럼 다시 태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태어나는 것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바람이 낳은 꽃기린을 보며 새삼 생명의 소중함을 새긴다. 바람에게서 생명의 기운을 감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