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를 위하여 운용의 묘를 살리다
가을은 오나 보다.
하늘이 푸른 민낯을 들어 기지개를 켠다. 구름도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오늘을 그린다. 분주하겠다. 바람이 찾아오면 산책을 나가보자 했는데. 오늘은 동네 어귀 보다 더 멀리까지 나들이 가보자 했는데. 서둘러 해를 깨운다. 해가 끓이는 커피는 따뜻하기도 향기롭기도 한데. 찻물은 아직 데워지지 않았다. 마음은 벌써 환한 낮을 향해 가고 있는데 시간만 늑장을 부리며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날마다 하는 일이라 지칠 만도 하겠다. 다른 오늘이기를 바라는 기대는 항상 서툴러서 어제를 다시 꺼내어 보는 쉬운 방법을 찾는다. 힘들지는 않겠다 안도하며 오늘 속으로 걸어간다. 향한 걸음도 쉬이 떨어지지 않지만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쓸쓸하겠다. 이유를 물으며 바람에 기대어 허위허위 돌아오겠다. 빈 하늘만 남겠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가을을 탄다는데 심술궂은 가을이 내게로 왔다. 새벽부터 마음이 부산하다. 차가움과 뜨거움,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다.
잠을 설친 탓이다. 새벽 창가 풍경과 마주한 것이 감성 회로에 오작동을 일으켰다. 오지 않는 잠이라도 다독여 껴안아 봤어야 했는데 늦어 버렸다.
가을을 타야 하는 남자는 이른 아침, 어제처럼 일어나 출근을 준비한다. 열흘 남은 시험과 사투 중이라 오늘도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하다 온다고 한다.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고 계란과 햄을 부쳐 도시락을 싼다. 귤은 디저트로 함께 넣는다. 귤향이 남은 감정 부스러기를 잠재운다.
이럴 땐 차라리 분주한 것이 낫다.
오늘은 분주해 보리라, 바빠 보리라 생각을 하며 구름처럼 오늘을 그려보았다.
그래, 오늘은 다이어트를 타깃으로 해야겠다.
아이들도 저마다의 계획대로 스스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학교는 가지 않지만 온라인으로 수업이 진행되니 책상 앞에 앉아 출석을 체크하고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과 대화하듯 화면에 나타나는 선생님과 친구들과 만나고 허공에 대고 대답을 한다. 안쓰러운 일이다.
며칠 전, 나 역시 ZOOM이라는 신문물을 이용해 학부모 권역별 회의를 2시간여 진행하였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아 헤매었고 집중하기 어려웠다. 몸은 베베 꼬여서 불편했고 무엇보다 비대면의 생활화가 되면 무척이나 팍팍하겠다는 생각에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런 수업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하루 식단까지 제출하며 No touch를 얘기했으니 두 녀석에게 갈 신경은 우선 꺼두어도 되겠다.
독한 것들! 다이어트 앞에서 나는 또 섬이 되어 홀로다. 모두 다이어트 귀신이 붙은 거다.
몇 년 전, 일주일을 생으로 굶으며 다이어트에 성공한 남편에 이어 아들도 지난주를 통으로 굶었다. 이번 주는 1일 1 식이란다. 이미 딸아이는 지난 1월의 어느 날, 단식을 선언했고 지독한 다이어트 결과 15kg 감량에 성공했다. 아들도 이미 7kg를 빼고 룰루랄라 재미가 들렸다.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할 것이지 웬 단식투쟁들인지 모르겠다. 나는 매번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매미처럼 다이어트를 하는 식구들과 붙어 결연한 의지를 다졌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모두 성공했는데 나만 실패했다.
음식 앞에 번번이 무너지고 만다.
다이어트 방법은 사례를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줄줄 댈 수 있을 만큼 많다. 무조건 굶고 보는 다이어트부터 원푸드 다이어트, 황제 다이어트, 간헐적 다이어트, 해독주스 마시기, 레몬 디톡스, 탄산수 다이어트, 하루 1000kcal만 섭취하는 스코츠데일 요법 심지어 먹는 약과 시술까지. 지난 70년간 명멸을 거듭한 다이어트 방법은 26,000가지가 넘는다. 방법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실패 확률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효과보다는 독이 되는 방법이 많다는 반증이겠다. 실제로 극한 다이어트로 인해 남편과 딸은 탈모증세가 나타나기도 했었다.
나는 이들 高 씨 성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른 金 씨 성을 쓴다. 태생적으로 다이어트가 안 맞는 체질일 것이다. 다이어트를 할라치면 분리 불안 증세가 나타나고 성격이 매우 까칠해진다. 수면장애와 수전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행동장애, ‘아이 C’만 반복하는 언어장애, 눈의 초점을 잃은 영혼 가출 상태에 빠진다.
"나를 단식원으로 보내달라”고 악다구니를 쓰기에 이른다.
한 번 맺은 인연의 소중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이니, 음식과는 연(緣)을 끊을 수 없다. 나만의 다이어트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받아들여 마땅하다.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해 보리라. 다이어트, 이번엔 성공이다!
냉장고에 있는 색색의 재료들을 모두 꺼내어 본다. 모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다. 색색의 야채들은 저마다 뛰어난 성분으로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
토마토의 자태가 오늘따라 곱다. 너로 정했다.
유럽 속담에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파랗게 된다'라고 했다. 토마토의 효능 때문이다. 의사가 할 일을 잃게 되니 새파랗게 질릴 밖에. 속담까지 센스가 넘친다.
색색의 채소들로 야채수프 혹은 해독수프를 만들어야겠다. 이름하여 컬러푸드 해독 디톡스!
이왕 재료들을 늘어놓았으니 추억 한 자락도 꺼내본다.
<응답하라 1988>에도 가끔 등장하던 경양식집 얘기다. 까만 조끼를 차려입은 종업원이 돈가스나 스테이크 등을 주문하면 영혼 없이 묻곤 했다.
“밥으로 드릴까요, 빵으로 드실래요?"
다음은 "수프는 뭐로 하시겠어요? 야채수프와 크림수프가 있습니다." 나는 "야채수프요" 대답한다.
항상 궁금했다. 왜 야채수프는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것일까? 열에 아홉은 크림수프를 주문하니 대충 만들어서였을까?
그래서 가끔 토마토를 주재료로 야채수프를 만들어 먹었었는데 소환해 보기로 한 것이다.
색색의 재료들은 올리브 오일이나 버터를 취향대로 쓰면 되는데 다이어트를 위한 것이니 올리브 오일로 볶는다. 소금과 후추를 넣고 뚜껑 닫고 바각바각 끓이다 뭉근하게 끓이다를 40여 분. 훌훌하게 먹고 싶다면 물을 조금 넣어 끓이면 된다. 샐러리를 넣으면 상큼한 맛이 좋고 양배추나 가지 호박 등을 넣으면 감칠맛이 좋다.
입맛대로, 취향대로, 냉장고 안 상태대로.
보글보글 끓어라, 해독수프야
마법을 부려 보렴
바글바글 끓어라, 해독수프야
강해져라 강해져라
먹으면 살 빠지는 해독의 묘약!
이렇게 야채수프를 끓여 놓으면 변용이 쉽다.
야채수프 베이스에 무슨 짓을 하든 자유다. 나는, 아니 오늘은 토마토 스파게티용 소스를 조금 섞고 삶은 콩을 보태었다. 매운 것을 좋아하니 페파 론치니도 몇 개, 수프 끓일 때 깜빡했던 월계수 잎도 2장, 파슬리가루와 바질가루도 추가했다. 면수를 한 두 국자 넣으면 맛이 깊어지고 잘 어우러진다.
토마토 스파게티도 뚝딱!
이런 게 요리하는 묘미다. 운용의 묘다. 밀란 쿤데라가 ‘광고는 현대詩’라 했다면 요리는 ‘초현실의 詩’다.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들어 내는 작업이며 기쁨을 다듬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요리사가 될 걸 그랬나?...
음식을 만들며 다소 우울했던 기분이 없어져 버렸다. 기분도 좋아진 김에 한 술 더 떠 치즈까지 얹어 오븐에 살짝 데웠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맛이다.
어차피 할 말도 없고 쓸 말도 없게 생겼다.
나 다이어트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야채수프를 굳이 해독수프라 말바꿈 하며 '없던 지방까지 분해하여라' 최면을 걸고 있었을 텐데.
파국 아니고 파장이다. 끝장이다, 막장이다, 할 일 다 했다, 장사 접었다, 막 내렸다, 물 건너갔다, 볼 짱 다 봤다... 작심삼일도 못돼 하루 만에 다이어트 실패인가? 해독 어쩌구 하다가 오히려 다이어트에 독이 돼 버렸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다. 오늘도 음식 앞에 무너져 버린 작심에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쉿! 이건 특급 비밀인데, 최고의 다이어트는 들 먹고 많이 움직이는 거래!
*) 컬러푸드 성분과 효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