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은 예민하게 태어난다.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본다. 남들이 못 듣는 것을 듣는다. 남들이 지나치는 감정의 결을 포착한다. 그래서 음악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예민함은 양날의 검이다.
남들보다 아플 때 더 아프다
대니딕은 이렇게 말했다.
"예민하게 태어나서 그래요. 남들보다 아플 때 그 아픔을 더 집요하게 더 느끼고, 기쁠 때 진짜 너무 기쁘고, 스스로를 남들보다 더 미워하고, 세상을 더 사랑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인 거 같아요."
집요하게 느낀다. 그게 핵심이다.
일반적인 사람이 상처받고 하루 정도 아파한다면, 뮤지션은 일주일을 아파한다. 한 달을 아파한다. 때로는 1년을, 때로는 평생을. 그 상처가 곡이 된다. 가사가 된다. 멜로디가 된다.
기쁨도 마찬가지다. 작은 성취에 온몸이 떨린다. 한 명의 팬이 보낸 메시지에 울컥한다. 좋은 코드 진행을 찾았을 때 심장이 두근거린다.
예민함이 없으면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예민함이 있으면 일상이 힘들다.
창작에는 고통이 있다
제이햇은 솔직하게 말했다.
"뮤지션이라는 삶은 참 고달픈 삶입니다. 절대 쉽지 않는 삶이고,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창작에 고통이 있어요. 이거는 어느 장르든, 어느 예술이든 상관이 없을 거라고 봐요."
창작에 고통이 있다.
백지 앞에 앉는 두려움. 어제 만든 곡이 오늘 들으니 형편없어 보이는 절망. 머릿속 소리를 현실로 끄집어내지 못하는 답답함. 완성이 다가올수록 커지는 불안. 발표 후 찾아오는 공허함.
그는 덧붙였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데 돈이 안 들어온다. 돈이 들어오는 쪽을 계속 하자니 현타가 와요. 이건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 그 틈에서 매일 찢어진다.
양면성이라는 딜레마
한성찬은 자신의 양면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뻤다가 또 좀 다운됐다가, 기뻤다가. 정갈했다가 좀 풀어졌다가. 이게 좋은데 싫은, 약간 이런 느낌 있잖아요. 좋은데 네가 잘 안 됐으면 좋겠어. 이런 복잡한 게 좀 누구나 있겠지만, 저는 좀 그게 심하다고 생각을 하는 편이었어요."
뮤지션에게 이런 양면성은 낯설지 않다.
무대 위에서 빛나지만 무대 아래에서 무너진다. 신곡이 잘되길 바라면서 동시에 두렵다. 팬이 늘어나길 원하면서 노출이 불편하다. 혼자 있고 싶으면서 외롭다.
그는 이 양면성을 다루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
"우울해질 때도 그냥 우울해지기보다는, '오케이 활용해 보자. 이거 가사로 나오겠다.' 이런 식으로 제 우울에 대한 당위성을 만들어 주면서 해소를 하고, 이거 몇 문장에 잘 모셔뒀다가 나중에 쓰고."
우울을 가사로 바꾼다. 불안을 멜로디로 바꾼다. 감정을 재료로 쓴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다.
녹음할 때 많이 무너져요
림서림은 홈레코딩의 고통을 말했다.
"녹음은 그냥 홈레코딩처럼 알아서 혼자 하고, 혼자 받고, 혼자 하고, 혼자 받고. 사실 녹음할 때 많이 무너져요. 왜냐면 너무 이렇게 하고 싶은데, 이거보다 더 잘하고 싶은데. 항상 제 부족한 부분들이 가장 먼저 들리다 보니까."
부족한 부분이 가장 먼저 들린다.
이게 예민함의 저주다. 일반적인 청취자가 "괜찮은데?"라고 말할 때, 뮤지션은 0.1초의 박자 흔들림을 듣는다. 미세한 음정 이탈을 듣는다. 조금 약했던 브레스를 듣는다. 그래서 다시 녹음한다. 또 다시. 또 다시.
무한 반복 속에서 무너진다.
그럼에도 그녀는 말했다.
"매번 열심히, 열심히. 저번보다 더 낫게, 저번보다 더 나아지게. 이렇게 하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바람. 희망. 결국 그것만 붙잡고 간다.
축복받은 일이다
린치핀은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음악을 한다.
"지금 저의 상태에서 음악하는 삶이 어떠냐고 물어보시면, 솔직히 버겁고 힘들긴 한데. 그래도 퇴근하고 어떤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있다는 거, 그걸 할 의지가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축복받은 일이다."
버겁고 힘들지만 축복이다.
이 역설이 예민함의 본질이다. 고통스럽지만 감사하다. 힘들지만 하고 싶다. 무너지지만 다시 일어난다. 저주받았지만 축복받았다.
예민함은 선택할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남들보다 많이 느끼고, 남들보다 깊이 상처받고, 남들보다 오래 아파한다. 그게 뮤지션이다.
하지만 바로 그 예민함 때문에, 남들이 표현 못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남들이 만들지 못하는 것을 만들 수 있다. 남들이 전하지 못하는 것을 전할 수 있다.
예민함을 다루는 법
나도 예민하다.
공연 전날 밤 잠을 못 잔다. 관객 한 명의 무표정이 신경 쓰인다. 녹음한 파일을 백 번 넘게 다시 듣는다. 좋은 리뷰보다 나쁜 리뷰가 오래 기억난다.
처음에는 이게 약점인 줄 알았다. 고쳐야 할 것인 줄 알았다. 둔감해지려고 노력했다. 무신경해지려고 연습했다.
안 됐다.
예민함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타고나는 것이다. 그래서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성찬처럼 감정을 재료로 쓰는 법. 림서림처럼 "저번보다 나아지겠지"라는 바람을 붙잡는 법. 린치핀처럼 힘듦 속에서 감사를 찾는 법.
예민함을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예민함과 함께 살아가는 법은 배울 수 있다.
저주이자 축복
63명의 뮤지션을 만나면서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민했다. 작은 것에 상처받고, 작은 것에 기뻐하고, 작은 것에 온 마음을 쏟았다. 그래서 힘들어했다. 그래서 무너졌다. 그래서 눈물 흘렸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예민함은 저주다. 일상이 전쟁터가 된다. 매일이 롤러코스터다.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익사할 것 같다.
예민함은 축복이다. 세상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둘 다 맞다.
뮤지션은 그 사이에서 살아간다. 저주와 축복 사이. 고통과 희열 사이. 무너짐과 일어남 사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음악이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