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감옥을 벗어나

by DjGirin

"넌 어떤 장르야?"


뮤지션에게 가장 흔한 질문이다. 힙합? R&B? 락? 재즈? 인디? 뭔가 하나로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다.


하지만 많은 뮤지션들은 그 질문을 불편해한다. 자신을 하나의 장르에 가두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규정되는 게 싫다


제이햇은 직접적으로 말했다.


"제가 어떤 규정되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래퍼다 이렇게 불렸을 때 저는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난 랩만 하는 사람이 아닌데."


래퍼라는 호칭이 싫은 게 아니다. 랩'만' 하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게 싫은 거다.


"한 명의 아티스트로서 제가 다 할 수 있는 게 좋고. 그렇다면 한 장르가 아니라 되게 다양한 장르를 두루두루 할 수 있으면서 나만의 색깔을 내야 그게 자기 색깔을 더 강하게 하는 거잖아요."


그는 덧붙였다.


"어느 한 장르에만 매몰되는 게 그래서 저는 조금 약간은 매력이 떨어지게 느껴지더라고요."


장르에 매몰되면 매력이 떨어진다. 역설적인 말이다. 하나를 깊이 파면 전문가가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매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다양한 장르를 알아야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부드러운 걸 하고 싶을 때 부드러운 걸, 신나는 걸 하고 싶을 때 신나는 걸. 한 장르만 알면 선택지가 좁아진다.




뇌가 굳어지기 전에


제이햇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최근에 뉴스에서 본 건데 이게 30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어릴 때 들었던 장르만 듣게 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 이거 완전 나네 해갖고 갑자기 경각심이."


30대가 되면 뇌가 굳어진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어릴 때 좋아했던 음악만 계속 듣게 된다.


"내가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더 다양한 음악들을 할 건데 이렇게 뇌가 굳어지면 이거는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리미리."


그래서 그는 의식적으로 다양한 장르를 듣는다.


"조금 안 좋아하고 별로 안 찾아듣는 장르일지라도 일단은 끝까지는 다 들어본다. 좀 공부하는 느낌으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도 듣는다. 공부하는 느낌으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가 분명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장르를 정하지 않는다


베니는 작업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음악을 만들 때 장르를 정해 놓지 않는 편이에요. 그냥 그때그때 뭔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데 만들다 보면 장르들이 섞이기 시작해요. 어느 순간에."


먼저 장르를 정하고 그 안에서 작업하는 게 아니다. 만들고 싶은 걸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장르가 섞인다.


"듣는 게 다르다 보니까 맨날. 그래서 다양한 음악들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말씀드려야 될 것 같아요."


다양하게 들으면 다양하게 나온다. 입력이 다양하면 출력도 다양하다. 단순한 원리다.


그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르 상관없이


최유담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여러 가지로 나 되고 싶어서 장르 상관없이 재밌는 걸 다 하는 음악하는 사람이라는 점."


장르 상관없이 재밌는 걸 다 한다. 힙합도 하고, 발라드도 하고, 락도 한다. 재미있으면 한다.


LGW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어떤 장르이든 어떤 종류이든 상관없이 그냥 멋있다라고 느끼면 멋있는 거 같아요."


장르가 멋있는 게 아니다. 멋있으면 멋있는 거다. 힙합이라서 멋있는 게 아니라, 멋있는 힙합이 멋있는 거다. 발라드라서 촌스러운 게 아니라, 촌스러운 발라드가 촌스러운 거다.


"그냥 억지로 하려는 게 아니라 본인 자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데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 감동이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 그게 핵심이다. 장르의 틀에 맞추려고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표현하는 것.




장르 안의 장르


조우진은 재즈 베이시스트다. 하지만 재즈라는 단어 하나로는 부족하다.


"재즈라는 것도 사실은 되게 대분류의 장르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 정말 수많은 장르가 존재하고. 스윙, 라틴, 삼바. 정말 극단으로 가면 프리재즈도 나오고요."


재즈 안에도 수많은 장르가 있다. 스윙, 라틴, 삼바, 프리재즈. 재즈를 한다고 해서 이 모든 걸 하는 건 아니다.


그는 프리재즈는 안 한다고 했다. 자신의 영역을 알고, 그 안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그 영역이 하나의 장르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재즈라는 큰 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때로는 스윙, 때로는 라틴.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야가 넓어지다


권혁주는 음대에 가서 변했다.


"저는 블루스 기타는 무조건 블루스만 해 학교를 간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러니까 장르의 스펙트럼 일단 되게 넓어지고 시야가 되게 달라지더라고요."


블루스만 할 줄 알았다. 블루스 기타리스트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학교에 가니 다른 세계가 열렸다.


"제가 알고 있던 실용음악을 넘어서서 그냥 진짜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이 뭔지를 보여주는 그런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어서."


자기 색깔이 확실한 친구들. 장르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하는 친구들. 그들을 보며 영향을 받았다.


장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건 혼자 하기 어렵다.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를 깨닫는다.




감옥의 벽


나도 장르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재즈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즈가 아닌 음악을 하면 '순수하지 않다'고 느꼈다. 팝을 치면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VMR을 하면서 만난 63명의 뮤지션들은 달랐다. 힙합을 하면서 락을 하고, R&B를 하면서 발라드를 하고, 일렉트로닉을 하면서 어쿠스틱을 했다.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장르는 도구다. 표현을 위한 도구. 도구에 갇히면 안 된다.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은 재즈도 하고, 팝도 하고, 때로는 힙합 비트에 피아노를 얹기도 한다.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정체성은 그대로다. 하지만 재즈'만' 하는 피아니스트는 아니다.




벗어나기


장르의 감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첫째, 다양하게 듣는다. 좋아하지 않는 장르도 들어본다. 제이햇처럼 공부하는 느낌으로.


둘째, 장르를 정하지 않고 만든다. 베니처럼 만들고 싶은 걸 만들다 보면 장르가 섞인다.


셋째, 멋있으면 멋있다고 인정한다. LGW처럼 장르에 상관없이.


넷째,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사람을 만난다. 권혁주처럼 시야를 넓혀주는 사람들을.


장르는 분류 체계다. 음악을 정리하고 설명하기 위한 도구다. 창작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장르에 맞춰서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다. 음악을 만들고 나서 장르를 붙이는 거다. 순서가 다르다.




자유로운 뮤지션


63명의 뮤지션을 만나면서 깨달았다.


가장 매력적인 뮤지션은 장르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면서도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들. 힙합을 하면서 발라드의 감성을 담고, 재즈를 하면서 팝의 멜로디를 녹여내는 사람들.


그들은 장르를 넘나드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장르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했을 뿐이다.


장르의 감옥을 벗어나라.


그 안은 안전하다. 하지만 좁다. 밖은 위험하다. 하지만 넓다.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음악하는 것. 그게 인디 뮤지션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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