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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Feb 21. 2018

리틀 포레스트

La vita è un film


스페인어인 '케렌시아(Querencia)'는 피난처, 안식처 등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투우장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투우 경기장에서 소가 투우사와의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잠시 쉬기 위한 공간이 바로 '케렌시아'다. 최근에는 흡사 투우장처럼 치열한 현대인의 삶에 휴식처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칭하는 용어가 됐다. 오로지 부와 사회적 지위로 인생의 당락을 결정짓는 현대사회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뒷전이 되고 만다. 내가 이끌어 가는 삶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이끌려 가는 삶으로. 모두가 저마다의 짐을 지고 하루하루를 꿋꿋이 견뎌 내는 거다. 그러다 보니 지난한 일상 속의 단 한순간이라도 자발적 고립을 꿈꾸게 되고 자기 자신만의 쉼터를 찾아간다. 그곳은 눈에 보이는 공간일 수도, 보이지 않는 가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저 내게 안식을 주는 시공간이라면 어디든 될 수 있는 그곳. 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 내내 잠시 '케렌시아'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 혜원이 자신의 작은 숲을 향해 간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마치 '케렌시아'로 겹쳐 들리기도 했다.



<리틀 포레스트>는 도입부터 입맛을 다시게 한다. 영화 속 혜원은 산골 밭에서 나고 자란 신선한 재료를 이용해 요리를 하고, 먹고, 또 요리를 한다. 선명한 색감을 지닌 각종 채소들이 냄비와 프라이팬에서 조리되는 소리는 경쾌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음식과 겹쳐지는 혜원의 독백에서, 그녀가 왜 산골에 내려왔는지 알게 된다.

 혜원에게 이곳은 고향이자 도피처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고향을 떠나 홀로 살게 된 그녀는 졸업 후 고시 공부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산다. 끼니는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기 일쑤고, 그마저도 때를 놓쳐 이미 상한 도시락을 먹다 버리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남자 친구가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혜원은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과거의 보금자리로 왔다. 고향 친구 은숙이 돌아온 혜원에게 왜 왔냐고 묻자, 그녀는 대답한다. '배가 고파서. 진짜 배가 고파서'.

 

 

혜원의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오랜 친구 재하도 그녀를 찾아온다. 재하 또한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최근에 아버지의 농사를 이어받아 이곳에서 제2의 삶을 꾸려가고 있던 찰나였다. 그는 혜원이 이곳에 다시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밤에 무섭지 않도록 강아지를 선물해 준다던가, 재배한 작물을 나누어 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은숙과 재하는 혜원의 시골 생활에 온기를 불어넣는 존재다. 그들은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직접 만든 막걸리를 밤새 기울이기도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이라면 누구나 할만한 고민을 떠안고 있는 그들은 서로의 안식처다. 희로애락을 함께할 수 있는.

 처음에 혜원은 금방 서울로 돌아갈 거라 말했지만, 봄이 찾아오고 여름이 되고 가을로 변하고 그리고 다시 겨울이 찾아올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산골 마을의 아름답고 호젓한 정취 속에서 그녀가 만들어가는 음식 그리고 삶의 방식은 과거의 고달픔을 잊게 만들고, 그간의 허기를 달래준다. 농촌의 시간은 여유롭고 천천히, 더디게 흘러간다.



 사실 혜원의 뛰어난 요리 실력은 어린 시절 엄마에게 보고 배운 덕분이었다. 엄마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혜원의 곁을 지켰지만, 별안간 부엌에 편지를 남겨 둔 채 떠나고 만다. 엄마의 빈자리는 컸지만 오히려 딸은 보란 듯이 더 잘 살아보려 한다. 엄마의 레시피를 본인만의 아이디어로 재탄생시키고, 새로운 요리법을 창조해낸다. 그러면서 그녀는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도망과 편지의 내용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한다. 엄마의 작은 세계, 작은 숲에는 자연과 요리 그리고 혜원이 전부였다. 엄마 본인은 없었던 것이다.

 이제 혜원도 자신만의 작은 숲을 찾기로 했다. 이것엔 정답이 없다. 그녀는 고향에서의 삶을 통해 자신 스스로를 돌볼 줄 알게 됐고, 아픔을 이겨낼 힘을 얻었다. 처음 혜원이 산골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팍팍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본래의 삶을 '떠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산골은 떠나온 것이 아닌, 원래 있던 자리로부터 스스로 '되돌아온 것'이다. 도피가 아닌 선택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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