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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Jul 18. 2018

Cool in Bern

SWITZERLAND


여행의 순간을 상상으로 그려볼 때, 심장을 조금 더 빨리 뛰게 하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기차의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는 순간, 계획 없이 닿은 도시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순간, 길에서 마주친 낯선 이와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 스위스의 수도 베른은 이런 나의 상상이 고스란히 실현된 곳이었다. 오전에 융프라우에 다녀온 후, 나와 내 친구들은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 아쉬운 마음에 인터라켄역에서 기차로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베른으로 향했다. 차창 너머로는 주홍 구름이 어느덧 군청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목적지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나는 여전히 내 시선을 창밖에 두고 있었다. 기다란 다리를 건넌 직후 곧바로 그라피티가 잔뜩 그려진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찰나의 목격이었으나, 저곳은 뭔가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재밌는 일이 일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맞은편에 앉은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야속하게도 기차는 금세 눈앞의 장면을 바꿔버렸으나 우리는 내리자마자 외쳤다. 그곳을 찾아야 한다!    


Bern


 스위스의 '제1도시'라지만, 아무렴 익숙지 않은 이름이다. 베른. 사실 즉흥적인 결정으로 이 도시를 밟지 않았더라면, 내겐 스위스의 수도를 취리히라고 대답하는 불상사가 생겼을 것이다. 베른은 융프라우나 튠 호수가 이 나라의 전부는 아니다를 명징히 보여줬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던 해발 4158m의 설산과 에메랄드빛 호수가 지닌 대자연의 위엄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베른이 지닌 모습은 근사한 도시의 전형이었다. 일렬로 우아하게 늘어선 건물, 잘 정비된 도로, 끊임없이 교차하는 사람들. 때마침 울리는 종소리가 그들의 귀가를 알리는 듯했다. 초저녁이면 상점 문을 닫는다더니, 이미 닫힌 가게도 더러 있었다.

 


 도시의 면모에 감탄하기도 잠시, 우리의 미션이 떠올랐다. 아까 스쳐 지나간 베른의 힙한 공터 찾기! 역에서 멀지 않았으니 찾기 쉽지 않을까 했는데, 문제는 우리가 나온 출구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고 그쪽으로 통하는 길이 어느 쪽인지 감도 안 왔다. 이럴 땐 우리 넷의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하는 수밖에. 우선 구글 지도를 켠 후, 주차장 표시가 있는 지점을 찾아봤다. 언뜻 보기에 제일 가능성이 높은 한 주차장을 좌표로 찍고, 걸어가 보았다. 한 친구가 왠지 저쪽 같은데?라고 했고, 우리는 그 친구의 감을 믿었다. 그런데 정말 그곳이 맞았다. 너무도 기쁜 마음에 전력 질주했고, 도대체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 파악하고 싶었다.

 

 살펴보니 알 수 없는 그라피티들 사이로 몇몇 사람들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있었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무대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밴드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곳은 정녕 로컬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우리는 무대 쪽으로 가서 공연을 보기 위해 서 있었다. 빨간 불빛에 둘러싸인 밴드가 공연을 시작하자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잠시 후 세월을 구겨낸 듯한 가방을 멘 한 중년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Cool in Bern, right?"  


남자의 한마디는 곧바로 내 귀에 콕 박혔다. 아, 이곳을 말로 표현한다면 이것보다 정확한 것은 없겠구나. 마침내 앞의 있던 여자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눈을 떼지 못하고 멋쩍게 웃었다. 그는 베른은 이렇게 쿨한 곳이라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베른은 독일과 흡사하다는 것,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자주 이곳에 와서 맥주를 마신다고 했다. 이때도 역시나 맥주 한 캔을 홀짝이고 있었다. 나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당장에 모든 걸 내려놓고 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었기에 마시고, 춤추고,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대리 만족했다.

 

  우연한 발견이 가져다주는 짜릿함은 이런 것일까. 돌아가는 기차에서도 내내 웃음이 났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재밌는 장소를 보았고, 사람을 만났다. 이게 진정 여행이 아닐까? 무릇 꼭 가야 하는 장소, 봐야 하는 상징물,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꼽히는 것으로 구성된 'To do list 여행'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으나, 실상 그런 여행이 내 세계를 흔들 정도로 기억에 오래 남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되려 예상에서 벗어나는 온갖 형태의 사건들이 나의 여행길을 한층 아름다운 기쁨으로 채워준다. 내일의 여행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힘을 얻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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